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주일오전 10시, 예수참영성원에 오시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 전 찬양: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눈물 the tears of the love of God ㅣ문영재
https://youtu.be/IQ7yrmAtK0w?si=rMNy4-D3hWLzI9aN
■ 종소리 3번
■ 예배의 부름 (Call to Worship)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편 1-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은 오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5월의 따스한 햇살보다
더 뜨거운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만지십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을 내 몸처럼 아파하시며
먼저 손 내미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품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진정한 한 몸으로 묶어주실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기대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왕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예배찬양
복의 근원 강림하사 (28)
https://youtu.be/I-BjPHGRCcw?si=zNvK6EAm5eswZnv_
■■■ 📖 성경말씀 (개역개정)
[누가복음 10:33–35] — 선한 사마리아인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마가복음 1:40–41] — 나병환자 치유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가복음 5:14–19] — 거라사 군대귀신 들린 자 치유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마가복음 3:5] — 안식일 손 마른 자 치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특별찬양
[광주교회]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눈물
https://youtu.be/VTykYjudeOc?si=HMfEDccKuVcSqSKO
■■■ 설교
부활절 넷째주일
상처 입은 영혼 위로 흐르는 기름과 포도주 (한 가족, 한 몸으로 사는 5월)
#가족의 눈물에 공감하는 삶/ #불편함을 감수하는 한 몸 공동체
#주님의 손이 내 마음에 닿을 때 / #예수님과 함께 걷는 네 가지 치유의 길
#5월의 햇살보다 따스한 주님의 눈물 / #외로움의 쇠사슬을 끊는 강력한 공감
#당신의 창자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합니까?/ #우리는 정말 한 몸으로 아파하고 있습니까?
#부정함이 거룩함이 되는 신비/ #안식일에 일어난 거룩한 위반/ #배척받음으로 이룬 진정한 영접
#미움받을 용기로 시작하는 사랑 #당신의 외로움을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맘이 아파서 그냥 못 가셨대유/ 손 내밀어봐유, 주님이 다 고쳐주실 규/ 한 몸인데 나만 편하먼 쓰겄슈?/ 거라사까지 가신 주님 맘을 알겄남?
5월입니다.
달력에 빨간 날이 유독 많은 이 달에 우리는 어버이날, 어린이날, 가정의 날을 지납니다. 그런데 솔직히 여쭤볼게요.
여러분의 5월은 따뜻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따뜻하게 들리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오래된 상처, 채워지지 않은 기대, 말하지 못한 섭섭함.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픈 관계가 있습니다. 또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곳에서 가장 외롭고 고립된 느낌을 받은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짜 한 가족, 한 몸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네 장면을 함께 걷고자 합니다.
1부 —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 누가복음 10:33–34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그 길은 27킬로미터의 험준한 골짜기입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을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 길은 당시 '피의 길'이라 불릴 만큼 강도가 들끓던 곳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거기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피했습니다.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피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멈췄습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 —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의 내장, 창자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했을 때 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신체적 아픔을 느끼는 것, 그것이 이 단어의 의미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사마리아인은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참 불쌍하네. 누군가 도와주겠지."
그는 자기 몸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에 가족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가족의 아픔이 내 배 속이 아플 만큼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고, 부모님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몸으로 사랑하는 시작을 열 수 있습니다. 가족의 마음에 공감하는 마음에서 큰 한 몸이 시작됩니다.
2부 — 만지지 말아야 할 손을 내밀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마가복음 1:40–41
나병환자는 구약의 율법에 따라 공동체 밖으로 내쫓긴 사람이었습니다 (레위기 13–14장). 사람을 보면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치며 피해야 했습니다. 누군가 가까이 오기만 해도, 만지기만 해도 그 사람도 부정해지고 병도 옮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그가 꿇어엎드렸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 속에 얼마나 긴 세월의 외로움이 담겨 있는지 들리십니까?
치료를 요청한 게 아닙니다. 그는 가능성을 물었습니다. 이미 수없이 거절당하고 내쳐진 사람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대시며' — 헬라어 핲토마이(ἅπτομαι). 우연히 스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를 가지고, 굳게 잡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를 만지셨습니다.
세상의 부정함이 예수님을 오염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함과 생명이 나병환자의 부정함을 삼켜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만지기 불편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말을 꺼내기 어려운 가족. 가까이 다가가기 두려운 지체.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3부 — 미움받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찾아가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지나 이방인의 땅 거라사로 건너가십니다. 일부러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곳에는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쇠사슬도 그를 묶을 수 없었고, 그는 무덤 사이에서 스스로 몸을 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우리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미움받으셨습니다.
경제적 손실의 책임자로 지목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셨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한 몸 공동체의 사랑은, 대가를 미리 계산하지 않습니다.
도와줬을 때 돌아오는 감사와 인정이 있을 때만 움직인다면, 그것은 거래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척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5월 가정의 달, 때로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님, 손해 볼 각오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4부 — 고발당할 것을 알면서도 치유하시다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손이 마른 사람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만성 질환이었으니 내일 고쳐도 됩니다. 율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마가는 이 순간 예수님의 마음을 탄식하사(쉴뤼페오마이, συλλυπέομαι) 라고 기록합니다. '함께 슬퍼하다', '함께 애통해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손이 마른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동시에 그 사람을 외면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 앞에서도 함께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발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사랑은 때로 불편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가족을 위해, 지체를 위해, 체면보다 그 사람의 회복을 먼저 선택하는 것. 그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한 몸의 삶입니다.
결론 —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5월
네 장면을 걸어왔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멈춰 선 사마리아인.
만지지 말아야 할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민 예수님.
미움받을 것을 알면서도 돌아가신 예수님.
고발당할 것을 알면서도 치유하신 예수님.
이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아파하셨다는 것, 공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인 가정을 이루고, 한 몸인 교회를 이루는 첫 번째 걸음은 놀랍게도 '내가 먼저 아파하는 것', 공감입니다. 가족의 눈물 앞에서 내 눈이 먼저 붉어지는 것. 지체의 아픔 앞에서 내 마음이 먼저 무거워지는 것.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도 늘 경계를 넘어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내 몸처럼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파하심이 우리의 치유가 되었습니다.
적용 -
제가 외국인노동자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의 외국인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과 모임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함께 어느 공원에 잠시 편안히 산책을 하던 중에 저쪽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일행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추었습니다.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그쪽으로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인지, 누가 위급한 상황인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할 지, 생각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쪽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고, 도움도 그리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이 모두에게 들자 자연스럽게 천천히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편안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 또는 일생을 어려운 이웃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나의 일처럼 여기고 돕고 해결해왔던 깊은 영성과 삶이 그 순간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려운 이웃들의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귀울이며 함께하는 보이지 않는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성 프란치스코, 나병환자를 혐오하던 그가 말에서 내려 나병환자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그 환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은그릇을 훔친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주며 "당신의 영혼을 내가 샀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법(율법)보다 한 인간의 고통과 회복을 우선시한 예수님의 공감과 닿아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천막 교회 시절) 배고픈 성도가 찾아왔을 때, 성경 구절을 읽어주기보다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먼저 내밀었습니다. 그는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밥으로 보이신다"며 공감이 곧 선교임을 강조했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은 손해 보기 위해 오셨습니다. 손해 보는 사랑이 사람을 바꿉니다."라고 하시며, 머슴으로 살다가 장로가 된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낮은 자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때, 그 가문이 복을 받는다는 '머슴 철학'의 핵심이 바로 공감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말합니다. 책임지지 않는 동정은 공감이 아닙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비용이 더 들면 내가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공감은 감정의 공유를 넘어 삶의 공유입니다." 마포 양화진 묘역을 가꾸며, 이름 없이 죽어간 선교사들이 조선의 가난과 질병을 '자신의 일'로 여겨 목숨을 바친 것이 바로 거라사로 건너가신 예수님의 발자취임을 강조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은 아들(범희)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후 쓰신 '별세 신학'의 관점에서,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최고의 설교였음을 고백합니다. "비판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공감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 내가 아파봤기에 남을 고칠 수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성도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성급한 답을 주기보다, 그 고난의 터널을 하나님이 함께 걷고 계심을 인내하며 지켜봐 주는 것이 진정한 목회적 공감임을 설파합니다. 인간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앞섭니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분의 자녀로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예수님의 치유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신 것은 그의 자존감을 회복시키시는 행위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배려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멀리서 달려가 목을 안는 행위는, 아들의 잘못을 묻기 전에 아들의 부끄러움을 자신의 품으로 덮어버리는 공감의 극치임을 설명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말합니다. (Charles Swindoll) "사랑의 가장 큰 적은 증오가 아니라 '바쁨'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시간 관리'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바쁜 여행 중에도 멈췄습니다. 공감은 내 계획을 수정할 용기입니다.
이 5월에,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씩 닮아갈 수 있다면—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진짜 한 몸으로 변해가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급증하는 고독사는 현대인이 얼마나 '연결'되어 있으나 '관계' 맺지 못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더 지불해서라도 돌봐달라던 사마리아인의 '끝까지 책임지는 돌봄'은 현대 복지 사각지대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 한 사람을 정해보십시오.
내가 먼저 아파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찾아갈 그 한 사람을.
그것이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해주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삶입니다.
여러분, 공감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창자가 누군가를 향해 아려오기를 소망합니다. 거기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아파하심이 우리의 치유가 되었듯,
우리의 공감이 세상을 살리는 기적이 됩니다."
아멘.
■ 결단 기도
하나님,
푸르른 5월의 햇살 아래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만물 속에 깃든 당신의 숨결을 느끼며,
우리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부르셨으나 결국 한 몸으로 묶어주신
그 지극하고 크신 사랑을 이 시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완악했던 마음을 겸허히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눈물을 외면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의 고단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의 울타리를 높게 쌓아 올렸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무감각해진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부드러운 살처럼 피어나게 하소서.
서로를 향해 닫혔던 문을 열고, 새로움의 소망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하소서.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내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이 되는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가던 길을 멈춰 서고,
나병 환자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만지기 불편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갖게 하소서.
손해 볼 각오를 하고, 때로는 오해받을지라도
체면보다 회복을, 거래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단단한 결단이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머무는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위해 간절히 중보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아픔이 된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을 더하셔서,
부모의 외로움과 자녀의 눈물이 내 몸의 통증으로 느껴지는 참된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일터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 아니라,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또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문턱을 낮추고
세상의 상처 입은 이들을 품는 넉넉한 안식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몸과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기억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셨듯,
치유의 광선을 발하셔서 연약한 이들이 새 힘을 얻고 일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
이곳 예수참영성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참된 영성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이곳이
지친 영혼들이 쉼을 얻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게 하소서.
이곳을 찾는 모든 이가 한 몸 됨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시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은혜의 동산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봉헌찬양/ 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 봉헌기도
우리의 소중한 마음을 담아 봉헌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의 봉헌자 (**아. 김**, 이**, **로, 이**, *영* / 2026년 5월 2일까지)
[봉헌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불러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주간 삶의 고백을 담아 구별하여 드린 감사헌금과
영성원을 위해 보내주신 귀한 후원금,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깃든 후원물품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립니다.
이 예물이 쓰이는 곳마다 주님의 공감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소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영성원을 섬기시는 모든 손길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무릎 꿇는 중보자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갚아주옵소서.
특별히 유튜브 채널과 홈페이지 사역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말씀을 대하는 모든 심령 위에 동일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온라인의 사역이 생명의 강수가 되어 그들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소서.
드린 모든 손길과 마음 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결단찬양(220)/ 사랑하는 주님 앞에
https://youtu.be/K3rvZuRxDUM?si=-FMdZxGUdA9AQlic
■■■ [축도]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며
우리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먼저 아파하고 먼저 손 내밀며,
공감의 기적으로 가정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워가기로 다짐하는
사랑하는 예수참영성원 모든 성도들과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모든 지체들 위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아파하는 가정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송영]
주 너를 지키시고 (638장)
https://youtu.be/MYj3XF2Qfik?si=Sh10saa0txMuFdnx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