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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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로는 누나 루이제와 2명의 여동생, 그리고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당시 알자스는 독일 영토였으나 독일이 프랑스와의 영토 싸움에서 패하게 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알자스가 프랑스령으로 넘어가게 되어 슈바이처도 국적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으나 음악성이 풍부하여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퀸스바아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목사인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버지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되어 기독교 신앙심을 키우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가 소속된 루터교회 성도들이 주변의 가난한 농부들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1931년에 출간한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슈바이처는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성찬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목회자인 아버지로부터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프리카로 갈 계획을 세운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아니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근원은 훨씬 더 오래전인 어린 시절로까지 올라간다. 나는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근심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나만 혼자서 편안하게 생활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동급생 아이들의 비참한 가정 형편과 퀸스바아 교회의 목사 아들로서 행복하게 살던 나의 형편을 비교해 보면서 나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곤 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에 그에게는 웃지 못할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이 마치 산짐승의 털처럼 뻣뻣하여 놀림감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코르마르에 살고 있던 유리의 이모의 집에 초청을 받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지방에 있던 어떤 조그마한 미술관을 방문하였는데 그림 구경을 하다가 눈에 띄는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이모, 저건 누구를 그린 그림이에요?” “응, 그건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인 성 요한 사도를 그린 거란다.” “성 요한의 머리카락이 내 머리카락과 닮은 것 같지 않아요? 꼭 내 것처럼 뻣뻣해 보이지 않나요?” “정말 이제 보니 그렇구나.” “어쨌든 성경에 기록된 사람으로서 사도 요한만큼 훌륭한 성자는 없었단다.” “그러면 나도 저 요한처럼 얼마든지 훌륭한 성자가 될 수 있겠네요.”
참으로 우연한 기회였지만, 성 요한의 그림을 보면서 슈바이처의 머리카락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성자에 대한 희망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어릴 때부터 남들의 고통을 그냥 볼 수 없는 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와 함께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갔다가 새를 향해 막 새총을 쏘려고 하는데, 저 멀리 교회에서 순환절을 알리는 종소리가 마치 하늘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러 새들을 쫓아버렸습니다. 어릴 때 자기 전 어머니가 자기 침대 머리에 와서 기도해 주는데, 언제나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고 기도해 줄 사람이 없는 다른 생명체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어머니가 나간 다음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축복해 주시라는 기도를 덧붙였습니다.
슈바이처가 살던 동네에는 마슈라는 유대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축과 땅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는데, 반유대주의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돼지라는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받으면서도 전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슈바이처는 용서만이 악을 굴복시키고 갈등을 극복하는 길임을 확신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아무리 귀찮게 해도 항상 웃으시는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은 일이야. 누구든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웃어주어야지. 그러면 그들도 언젠가는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이러한 성장 환경이 훗날 슈바이처에게 박애심을 가진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밀림의 성자가 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1884년까지 마을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1885년 10살이 되어서야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는 윈스터 실업 중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밀하우젠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대식구를 거느린 개신교 목사였던 부친의 박봉으로는 생활 유지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어 쓸쓸해하던 작은 할아버지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단련으로 가정교육을 하였는데, 이는 슈바이처의 생활을 규모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1893년 10월 슈바이처는 유럽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프랑스 최대의 대학 중의 하나인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대학 생활에서 혼신의 열의를 다해 공부에 매진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1894년 19세 이상의 독일 국민에게 부여된 군복무를 위해 군 입대를 하였으며, 다행히 소속 중대장의 배려로 군인 신분이면서도 대학교 공부도 겸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방으로 훈련을 나갔을 때에도 그는 배낭에다 헬라어 성경을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군복무 중 성령 강림주일 휴가를 받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당시의 어려운 사회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한 휴가를 잠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성숙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이 있었습니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성스러운 목표였습니다. 그 결과 1899년 24세에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다음 해에는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미 20대에 라이마우로스에서 브레데까지라는 저서로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신학자였으며, 바흐 해석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음악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주장하고, 철학가로서는 칸트 철학을 연구하였으며, 예수 전 연구사를 30세에 발표하였습니다.
1906년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을 발표했으며, 풍압으로 인한 오르간 음색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1911년부터 그의 아내와 함께 편집한 바흐 오르간 작품도 출판하였습니다.
대학생 시절부터 꿈으로 간직해왔던 박애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30세 되던 1905년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수이면서 목사이고 의과대학 학생 신분이라는 1인 3역의 시간을 착실히 쌓아나갔으며, 37세 때인 1911년에는 그가 교수로 재직하는 대학의 교수 딸과 결혼을 하고 드디어 의학 공부를 시작한 지 8년 만인 1912년에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30세의 나이에 의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스트라스부르 신학대학의 젊은 교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작가라는 명성을 얻은 인생에서 뚜렷한 성취를 달성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슈바이처는 새롭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 거침없이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시작은 우연히 본 한 프랑스 잡지 속 기사에서부터였습니다. 콩고강 유역에 사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참상에 대한 기사였는데,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흑인들은 지금 당신을 부르고 있다.’라는 부제목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후 그는 성서 속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깊은 죄책감에 빠졌습니다. 저 멀리에 있는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할수록 커다란 인도주의 과제를 저버리고 전혀 돌보지 않는 우리 유럽인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는 꼭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는 분별이 없어 자기 집 문 앞에 나자로를 저버리는 죄를 지었다. 우리가 바로 그 부자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결심을 전해들은 친구들과 친척들은 입을 모아 그의 계획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며 한결같이 말렸고, 결심을 버리지 않자 오히려 비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행동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행동이 없는 사랑은 아무런 쓸모없는 휴지만도 못한 것이니까요.”
슈바이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말만 앞세우지 않고 일하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었다. 오랫동안 나는 사랑을 역설해 왔다. 나의 새로운 직업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고 싶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은 그에게 한 낱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38세 되던 1913년, 마침내 그토록 꿈꿔오던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떠났습니다. 긴 여정을 거쳐 랑바레네에 도착했을 때 슈바이처는 시간이 흘러도 방향을 바꿔도 같게 보이는 단조로운 자연의 신비한 힘을 느꼈고 아프리카에 푹 매료됐습니다.
하지만 의료 활동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의료 활동에 필요한 물자까지 스스로 마련해야 할 만큼 현실은 슈바이처의 헌신을 강요했습니다. 의료 물자는 바흐에 관한 그의 책에서 얻은 인쇄 수입과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로 번 돈으로 조달했습니다. 거처는 다행히 파리 복음선교회가 마련해 주었지만, 병원이 완성되기 전까지 사용할 마땅한 공간은 찾지 못해 닭장을 진료실로 써야만 했습니다.
아내가 의료기구를 관리하며 외과 수술 준비를 도왔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매일 30~4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저녁에는 병원을 고치며 바쁘게 생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습도는 약품 보관에 어려움을 겪게 했고, 환자들에게 약의 사용법을 이해시키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진료는 피로를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 최악의 컨디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습니다. 이곳에서 흑인들을 진료하고 돕는 기쁨에 비하면 잠시의 이런 불편함은 별것이 아니었다. 부족한 물자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다. 상처가 곪고 헐어 고생하던 환자가 마침내 깨끗한 붕대를 감고 이제는 상처난 발로 진흙 속을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에서 일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병에 걸려도 어떤 병인지도 모른 채 죽음과 만나야 하는 사람들. 슈바이처는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문화를 존중했고, 생명의 존엄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의료 혜택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유럽에 사는 자신들과 똑같이 아프고 더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큰 책임감을 느끼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자신의 기회에 오히려 더 감사했습니다.
“가련한 환자가 실려왔을 때 내 감정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나는 사방 수백 킬로미터 안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생명을 구해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고통의 나날을 줄여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새로이 나에게 주어진 커다란 은총이다. 수술이 끝났다. 나는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어두운 입원실에서 그의 곁을 지켰다. 정신이 완전히 다 들기도 전에 그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제 안 아파요. 정말 안 아파요.’ 그는 내 손을 더듬어 찾더니 한참을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백인과 흑인이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로 경험했다.”
이렇듯 수많은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의료 활동에 감동하여 당시 원주민들은 슈바이처를 마법사라는 뜻의 오강가로 부르고 존경했습니다. 통나무 배인 카누를 타고 가노라면 노를 젓는 흑인들은 자기들끼리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칼로 살을 쬐지만 우리에겐 다시없는 신기한 마법사.
누구를 대하든 존엄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던 슈바이처.
그는 앞선 문명을 가진 백인, 그들의 목숨을 좌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권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담담히 아프리카에 다가갔습니다.
슈바이처는 병원에서 많은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각을 많이 하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도 백인보다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그들을 보며 그의 아프리카 행이 바로 속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문화는 커다란 죄과에 짐을 지고 있다. 흑인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할지를 선택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선행이란 자선이 아니라 속죄이다.
수많은 말이 아닌 순간순간에 삶의 예배로 드려지는 희생과 사랑은 진실로 복음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합니다.
자금이 부족하여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의 기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는데 1917년 42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 지방 출신인 슈바이처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함께 프랑스 군의 전쟁 포로가 되어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슈바이처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부인도 이질로 인해 몸이 몹시 허약해졌습니다. 같은 해에 그의 어머니도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게 되었으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불의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의료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민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연주회도 개최하고, 철학, 신학의 강연 등도 하면서 활발한 모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군의 화살이 빗발쳐도 담대히 돌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하며 출간한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출판하게 되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한 자금에 보탬이 됐습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은 물론이고 신학자로서의 선교 활동, 음악에 대한 열정, 저술 활동 등을 통해 그는 점차 전 세계적인 문제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문학 철학을 출간하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생명 존중’에 대한 그의 철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윤리 원칙으로서 그는 이 원칙이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신성함으로 모든 생명을 경외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저녁 시간 방에서 등불을 켜고 공부할 때도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날파리들이 등불에 날아와 타죽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뭇잎을 따지도 않았고, 꽃을 꺾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수술할 때 병균을 죽어야만 하는 것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말년에는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어머니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데 혼신의 힘을 경주했습니다.
이렇게 의욕적인 활동 중에도 의료봉사에 대한 그의 철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중단했던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1924년 7년 만에 다시 아프리카의 랑바레네로 돌아가 오고웨강 상류 약 3.2km 지점에 큰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 뒤 그곳에 한센 환자들의 거주지도 추가로 마련했고,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1925년에 들어서 병원은 활기를 잃어갔습니다. 함께 일하던 의사들은 물론 간호원들까지도 기력을 잃고 시름시름 앓아갔습니다. 유럽의 기후에 익숙한 그들이 열대성 기후에 적응한다는 것은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슈바이처 자신까지도 다리에 번진 종기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두조차 신을 수 없어서 나막신을 끌고 다녔고, 급하거나 힘든 일을 해낼 수 없는 형편까지 되었습니다. 더욱이 6월에는 아프리카 중부지방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 이질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높은 열로 신음하면서 피똥을 줄줄 싸다가 심하면 말 한마디 못하고 탈진해 죽어갔습니다. 열대지방에서의 이질은 전염의 힘이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아무리 위생관념을 원주민들에게 반복해서 알려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전염병자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 어디에도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만 낙심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바보였어. 이런 야만스러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의사가 되겠다고 나서다니. 선생님이 바보인 것을 이제야 아셨나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았다고요.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같은 바보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어느새 조수 요세프의 눈에도, 슈바이처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낙심천만이었던 그에게 이 한마디는 구원의 생수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936년경에는 이 병원이 350명의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머무를 수 있을 만큼의 규모로 발전했고, 한센 환자 거주지에는 15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생활 터전을 가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병원의 규모는 약 36명의 백인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근로자들이 환자들을 보살필 정도로 튼튼했습니다. 이렇게 봉사의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슈바이처는 세계의 위인, 인도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리며 세상 사람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신학자로서의 본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음악가로서, 파이프, 오르간 전문가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1928년 슈바이처는 괴테상을 수상했습니다. 다양한 활동으로 인류애를 실천한 슈바이처는 당연히 괴태상의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전도와 진료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 운동을 하였고, 평화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단 하루도 하나님께 평화를 비는 기도를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슈바이처의 나이는 70세에 가까웠지만 병원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계속하여 글을 쓰고 나면 밤 11시가 되지만 이때도 금방 자리에 눕지 않고 병실을 한 차례 돌아본 후에야 잠자리에 들곤 하였습니다. 그 후 전쟁은 끝났지만 식량이 떨어져서 병원 문까지 닫는 상황까지 발생했고, 스스로가 절약의 모범을 보이면서 직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1952년에는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을 나환자촌을 추가로 건설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노벨상이 없어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늘 신음하는 환자와 함께하면서 이런 통찰을 얻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에는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라.”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슈바이처가 기차를 타고 갈 때의 일화입니다. 기자들이 슈바이처를 취재하기 위해 기차에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1등칸과 2등칸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등칸에서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그러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기차에는 4등 칸이 없더군요.”
기자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1등 칸이나 2등 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슈바이처가 병원을 지을 때 나무를 베고 운반하고 못질하는 일을 직접 했습니다. 그때 혼자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옆에 있던 한 청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저는 지식인이어서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막일은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도 자네만 할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러나 웬만큼 배웠다 싶으니까 이젠 아무 일이나 다 하겠더군.”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는다는 말씀처럼 이러한 슈바이처의 겸손한 마음은 사람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 뒤에 고국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위와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80살의 슈바이처에게 어느 날 헬레네는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이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실 작정인가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입니다.”
슈바이처가 또 한 차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어떤 한 기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을 한마디만 들려주십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따르는 것보다 더 값지고 뜻 깊은 일은 없습니다.” 이 한마디뿐입니다.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감은 변함이 없어서 새로 창설된 도성 십자 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영국의 명예 메리트 훈장을 수훈하는 영광도 찾아왔습니다.
슈바이처는 말년의 프랑스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자네가 이 편지의 회신을 받기 전에 아마도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로 생각하고 싶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 년간을 헌신할 수 있었고, 오늘 90세의 노인이 된 이 순간까지 계속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의 섭리이신 줄을 확신하고 나의 진심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다네.”
슈바이처는 90세 되던 1965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 자기 묘비명의 문구를 손수 만들면서 식인종 유머를 썼습니다. “식인종이 나를 잡으면 그들이 이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슈바이처 박사를 먹었다. 그는 끝까지 맛이 좋았다. 그리고 끝도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
아프리카 의료봉사에 평생을 바친 밀림의 성자 치곤 이색 묘비명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익살스러운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끝까지 소금의 맛을 잃지 않았던 예수님의 참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자들의 구세주로서의 삶을 이어간 슈바이처도 세월은 거스를 수가 없었던지, 90세의 생일 이후로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어 1965년 9월 4일 그가 평생을 사랑으로 헌신한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실 슈바이처는 아내 헬렌의 브레슬라우가 세상을 떠난 이후 평생 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고 아프리카에 머물렀습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부인과 함께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병원 옆에 묻혔습니다. 오고웨강 언덕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그가 직접 깎아서 만든 십자가가 그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흑인들은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 오 우리의 아버지 슈바이처는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아프리카인들을 살폈던 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슈바이처가 남긴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섬김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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