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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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는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년 장기려는 매우 약한 체질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유독 병치레를 하는 손자를 안쓰럽게 여겨 늘 품에 안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가 자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서 크게 쓰이는 훌륭한 일꾼이 되게 해 주소서.” 기여의 몸은 유약했으나 7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영특하였기에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기여의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자식에 대한 부친의 교육열은 대단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힘써 주셨습니다. 기여가 다니던 용천의성학교는 기독교 계열의 학교인지라 성경을 중심으로 문과 공부가 유지여서 신의주 보고에 지원을 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본인도 놀랐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욱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사촌이 다니는 송도고에 합격을 하자 이제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 와보니 마음도 훨씬 가벼워지는 듯 했습니다. 자유스러운 분위기는 세상을 알지 못하는 기려에게 호기심을 자극했고, 2년간은 방황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교회 생활이었습니다. 기려는 세례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을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리며 교육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전국에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공과대학을 지원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자신 하나를 믿고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대준 부모님께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려는 수업료가 싼 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국립경선의전의 수업료가 싼 편이었기에 기려는 할 수 없이 공대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장기려는 의전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합격만 시켜주신다면 평생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경선 의전에 안심하고 갈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합격하게 해 주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어느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었음을 훗날에 알게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쓰시려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습니다. 어렵게 입학한 대학이지만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대학생활이 낭만을 즐길 만한 시대적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마음 놓고 대화할 만한 공간도 없었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 단체인 YMCA에 발을 들이면서 한국 학생들과 자연스레 교재가 이루어졌습니다.
의대생인 장기려는 그곳에서 민족 의식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의사에 대한 사명을 재차 확인하였습니다. 분명 꿈은 있었지만 이제 졸업 후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갈 것인지 모든 것이 불투명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장기려에게 신앙은 마음이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암울한 시기지만 묵묵히 준비하도록 하나님은 이끌어가셨습니다. 꿈을 주시고 또한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졸업을 앞두고 한 동창의 소개로 맞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아직 가정을 꾸려갈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결혼은 안중에도 없었지만 성화에 못 이겨 나갔던 것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평생 동안 같이 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 그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결혼 조건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평생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아내 또한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나의 부모님을 잘 섬겨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는 내가 공부를 할 동안 생활비를 벌어오지 못하더라도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염치없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무능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고 정직한 그의 이런 모습을 좋게 보았던지 결혼은 성사되었습니다. 장기에 다소 융통성 없는 것 같은 순수한 성향은 결혼 후 가정생활을 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월급을 제대로 가지고 들어온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난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은밀한 사랑 실천으로 가정은 늘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의 뜻을 따라준 아내를 보면 이 또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장기려는 의사로서 따르는 명예와 부를 누리기보다 언제나 나누는 일에 마음이 빨랐습니다.
의사 남편이라는 그늘 아래에 있지만 아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살림을 도맡아 하는 아내는 하는 수 없이 바느질을 하여 살림에 보탬을 하기도 했습니다. 장기려는 자신이 하는 대로 말 없이 따라준 아내를 향하여 때론 연민과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인지 전쟁으로 인한 40여 년의 생이별에도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의 생사마저 확인하지 못한 가운데 잠기려는 기도 속에서 늘 만남을 그리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장기려는 후일 아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게 하심은 하나님의 생명의 사랑을 체험하라고 하신 제도임을 확인하고, 그 후 내가 혼인을 주려 할 때에는 이 말로써 주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시고 이루신 성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장기려는 서로 사랑하되 주 안에서 아끼며 존경하며 베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야말로 복음적인 사랑으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장기의 인품과 의수를 귀하게 여긴 스승은 총명하고 성실한 제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마음에 두었습니다.
나고야 대학의 박사 논문이 통과되자 제자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각별했습니다. 당시 일본인 의사를 실력으로 압도하던 외과의 백인재 교수가 스승이었습니다. 더욱이 조선 최고의 의사 밑에 있다는 것은 장래를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스승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의대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승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난한 환자들이 많은 평양의 기홀병원으로 갔습니다. 제자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의 뜻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순수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도 때로는 큰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장기려 박사를 동료 의사들은 껄끄럽게 보았습니다. 자신들보다 한참 후에 들어온 장기려 박사에게 원장직을 맡기는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으로 장 박사의 마음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임 원장으로 자리에 앉은 지 두 달 만에 외과 과장으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까? 원장이란 직함은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였어. 외과 과장으로 더 많은 환자를 돌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시련도 못 견디면 낙오자가 되는 것일 거야.”
뜻밖의 상황 앞에서 장기려 박사는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여전히 주위의 괴롭힘은 계속되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묵묵히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결같은 장 박사의 태도에 다들 감동하고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조선의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간암 수술에 성공하였고, 한국의학계에서 한 획을 잇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이때 기자들의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수술칼을 잡고 명령에 따라 수술한 것뿐입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겸손하고 정직했습니다. 이 일로 장기려는 외과의로서 명성을 고쳤습니다. 김일성 의과대 외과 학과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정중히 사양을 하자 일요일은 일하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했기에 세상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수술 전에도 기도하고 성실하게 주일 성수를 했습니다. 환경에 조금도 타협이 없는 시대의 또 다른 순교자였습니다. 그해 말 김일성으로부터 모범 일꾼상으로 3천 원이라는 큰 상금을 받았는데,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느 때든지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소신껏 일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 전쟁으로 인해 평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환자들을 돌보며 수술을 진행하는 가운데
병원마저 퇴각하라는 군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다급한 상황으로 부인과 어린 자녀들은 대동강을 건너겠다고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그 역시 잠시 후면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둘째 아들 가용을 데리고 평양을 떠난 것이 이 생에서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쫓기다 보니 얼떨결에 부산까지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뜻밖의 고향 후배를 만나 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중에 낯선 곳에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만큼 절실한 문제도 없었습니다.
암울한 시기에 안정된 터전을 얻었다는 안도감보다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방첩부대 취조실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신 김일성이 보냈지 죽고 싶지 않으면 사실을 자백해!” 김일성 대학의 교수요, 상까지 받은 의사이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장기려는 예상치 못한 긴장의 순간에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습니다. 진실은 말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에 상황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여시어 평양에서 알고 지낸 목사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자선병원을 세우기 위해 5천불을 모금한 사람을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경성의전에 들어갈 때에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룰 때가 온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창고를 빌려 처음 시작한 자선병원의 이름은 복음병원이었습니다. 수술대가 없어 나무판으로 짜야 했고, 병원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료 진료라는 소문이 나면서 하루 1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모금해 온 5천불은 필요한 수술 기구 구입으로 인해 바닥이 났지만 기도로 밀고 나갔습니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후원이 들어왔고, 후배 의사도 뜻을 같이해 한 식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병원 식구도 늘어갔습니다. 넉넉지 않은 병원 재정과 시설 또한 보잘 것 없었지만 병원은 늘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났습니다. 복음병원은 자원봉사의 손길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죽을병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되자 아예 병원에 들어와 봉사하는 사람 등으로 기적처럼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휴전 협상이 되면서부터 지원이 끊어지자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병원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위기 때마다 기도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이 장기려의 전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각처에서 건축자재를 지원하는가 하면 신학교와 복음병원을 짓기 위해서 성도들과 미국에서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1956년에 병원 설립을 하였습니다.
장기려에게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남에게 좋은 일을 하자는 것뿐이었습니다. 천막에서 기도로 시작한 복음병원이 세워지기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위기가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전국에서 복음병원을 찾는 가난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때론 환자들이 수술을 받고 병은 나았지만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자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은 원장실이었습니다. 바보같이 순수하고 착한 그는 ‘논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농작이어서 치료비가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하는 사정을 듣고는 눈물겨워 하기도 하였습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때운다고 하면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병원 운영도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찾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내가 밤에 슬그머니 병원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도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환자의 남루한 옷을 보면 시장에 가서 내복을 사다 주었고,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위해서는 처방전에 닭 두 마리 살 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마음을 다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을 닮은 의사였습니다.
하루는 외출을 위해 병원을 나서는데 걸인이 구걸을 했습니다. 호주머니를 뒤졌으나 돈 한 푼이 없었습니다. 걸인은 몹시 실망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몇 걸음을 가다 멈춘 장기려는 뒤돌아서서 걸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어 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은행에서 도난 수표가 아닌가 연락이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일생을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산 장기려는 바쁜 중에도 성경 공부와 복음 전파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은 의료일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임을 통해 그동안 복음병원이 누구든지 치료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지금의 의료보험 제도와 같은 청십자 운동은 이렇게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고 노인들에게는 조촐한 경로잔치를 열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은밀한 선을 행하던 일들이 조직을 통해서 확대되어지자 1958년에 막사이사이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저는 오로지 의사로서 직분을 잃지 않고 인수를 베풀어 왔으며, 또한 하나님의 충실한 아들로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온 평범한 소심인입니다.”
이름이 알려질 때마다 마음이 높아질까 봐 경계하였고, 병원 옥탑에 살면서도 받아온 상금 1만 달러를 전부 기부하였습니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내던 그는 1985년 남북 분단 40년 만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수많은 이산가족이 있는데 나만 특별 혜택을 받기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이유로 끝내 거절했습니다. 아쉬움과 그리움을 뒤로 한 1년 후 북한 가족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진과 편지를 비롯해 부인의 노래를 녹음한 테입을 들으며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그리움을 풀어내었습니다. 몇 날이 지나면 다시 만나려니 했던 것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녀들 모두는 안정된 지위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생전에 만나지 못할지라도 기도했던 것이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92년 장 박사는 뇌졸중이 발병하여 3년간 투병을 하던 끝에 천국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오직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는 묘비명대로 장기래 박사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명예가 보장된 의사의 직업보다는 복음적인 삶을 천직으로 알았던 장기려. 자신이 묻힐 땅 한 평도 남기지 않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의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이오, 참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욕망의 굴레를 벗어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오.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은 마음 안에서 이루어짐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부는 참된 부요가 아닙니다.
일생을 청빈과 섬김 속에 살다 간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의 삶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그는 단지 평범한 의사로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알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숭고한 정신은 시대의 빛이요 등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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