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https://youtu.be/qHsluzzuT04?si=D8ZHDlSLW_C5zMK2
주기철은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주현성 씨와 조재선 여사 사이에 사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었습니다. 기복이 위로는 세 형과 세 누나가 있었는데 철이 들면서 자신이 배다른 형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복은 형들과 누나들이 엄마가 없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미안하여 엄마 곁에서 자지 않고 형들과 함께 잘 정도로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습니다.
또한 기복은 어릴 때부터 총기가 뛰어나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어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습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 학교에 다녔습니다.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아직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지구로 순회 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습니다.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습니다. 가자 오산으로 그곳은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 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습니다.
오산학교의 유영모 선생은 수업을 시작할 때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싫어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상관치 않고 계속했으며 교과에도 없는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남강 이승훈 선생도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예수님께 사로잡혀 학교 교육의 근본을 기독교 정신에 두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을 잘 삭혀야만 합니다. 나라도 중하지요. 내 민족이 겪는 고난은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날마다 냉수마찰을 하고 안락의자에 앉지 않고 상 위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몇 시간이고 명상에 잠기는 등 학생들에게 수도적인 생활의 본이 되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무저항 민족주의자 간디를 존경하며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하였습니다. 소금으로만 양치질을 하고 팥, 비누로 세수를 하며 평생 국산품밖에 쓰지 않는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기철은 애국정신을 배웠습니다.
1915년 기철이 오산학교 3학년 때 남강 선생이 감옥에서 풀려나셨습니다. 내가 하도 바쁘게 동분서주하다 보니 성경을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었는데 감옥에서 하루 종일 마음 놓고 성경을 읽었지요. 구약을 수십 번 읽고, 신약을 100독은 했을게요. 아마 오산학교 젊은이들한테 내가 좀 부족한 데가 있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좀 더 성숙하라고 감옥에 보내셨던 게요. 남강 선생은 변소 청소도 손수 하였습니다. 더러 학생들이 빗자루를 빼앗으려 하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게 이일 뿐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는가?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여러분을 가르칠 힘이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 자리를 깨끗하게 치워드리는 것이 내 기쁨이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애가 강하여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도 굳어졌습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프렌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외우거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유행할 정도로 경건했습니다.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였습니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제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습니다.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큰 형 기원이 하던 염전과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 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상속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을 보고 눈도 나았지만 몹시 쓸쓸한 나날을 신앙으로 달래면서 살아갔습니다. 새벽 기도에 열심히 참석하고 청년 집회에도 부지런히 나가서 봉사했으나 무엇인가 비어 있는 듯한 허전한 마음은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기선 목사님이 소개해 준 안기영 씨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 있지 못했습니다. 친구 이학신과 함께 청년 운동을 하느라고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철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는 허망함에 빠지곤 했습니다. 많은 기대 속에서 흥분하며 일어났던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 형도 교회를 등졌습니다. 교회에서 10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아 이것도 아니다. 정녕 삶은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 첫 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하며 문창교회로 갔습니다.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 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매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습니다. 셋째 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오. 귀머거리에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김익두는 막대기요 김익두는 없소.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습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갈급해하던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으로 모두 눈물범벅이 되어 서로 얼싸안고 뒹굴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 진정한 도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형님들은 모두 화를 내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기철은 머리를 빡빡 깎고 결심을 새롭게 했습니다. 기철은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는 이국 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뜨거움이 솟아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습니다. 신학생 대부분은 전도사나 조사 노릇을 하며 봉사했는데, 기철은 16년 전 호주의 소난로 선교사가 설립한 양산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했습니다. 열렬한 성도들이 있고 번듯한 예배당도 있었지만 아직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양산은 기차로 하룻길 되는 1500여리인데 매주 오르내리니 어머니와 아내는 기철을 생각하며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고생스럽거나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자기가 살 길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남강 선생님이 친히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60을 넘기며 연루해 가시는 모습을 뵈니 송구하면서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강 선생은 그윽한 눈길로 기철을 바라보며 말씀했습니다.
“우리 조선의 독립은 오직 교육에 달려 있어 이것은 나 혼자의 뜻이 아니라 2천만 우리 조선의 요청으로 들어야 하네. 자네야말로 사람을 키워야 할 인재야. 이제 신학교도 마쳤으니 일본에서 유학하여 오산학교를 맡아주어야겠어.” 자신을 이토록 믿어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감사했지만 기철에게는 이 재회가 유혹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뜻을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제 몸을 하나님께 다 바쳐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두 길을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기철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갔습니다.
한편 일본 총독부는 조선 호적령을 공포하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내각을 조직했습니다. 전 세계가 뒤숭숭했습니다. 그때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 일대에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두려운 재앙 앞에 민심이 흉흉해지니까 이를 수습해 보겠다고 궁리를 짜낸 것이 조선 사람이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으며 우물마다 독을 풀어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혈안이 되어 조센징을 찾아다니며 칼, 죽창, 몽둥이로 마구 죽인 것이 수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중국 등지에 열병처럼 퍼진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까지 전염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청년운동을 틀어잡고 정면으로 교회에 도전해 왔습니다. 이런 시국에 주기철은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번째 아들 영만이와 세 번째 아들 영묵이가 태어났습니다.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 갈 수가 있을까? 새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한다.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동행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26년 봄에 설립된 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주 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대개 목요일까지 설교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방 두 칸의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재가 없어 집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생활하며 산에 가서 처리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주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감격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내가 딴 일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에는 앞장서겠다고 각오했습니다. 주 목사는 구봉산 바위굴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의 교육이나 재정 관리에 빈틈없이 철저했으며 그의 사례비의 반은 교회로 되돌아왔습니다. 교회에서는 보릿고개 때도 점심을 지어 배고픈 사람을 먹일 정도로 구제와 선교에 힘썼습니다. 주 목사는 기도와 철저한 생활 보살핌으로 어수선한 시국과 기독교계를 성경 말씀으로 지키며 든든히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래서 위임받은 지 한 해 만에 100명의 교인이 3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주 목사가 구봉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다 늘 아내 몫으로 친정에서 주신 땅 6천 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양심에 걸렸습니다.
‘굶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땅을 어떻게 끼고 있겠소? 내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권면하겠소. 나의 아내인 당신이 주인이니 내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게요. 처분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봅시다.’
봅시다. 남편의 말이지만 끝없는 목회자 가정에 가난한 살림을 하다 보니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남겨두었던 어미의 마음인지라 부인은 계속 반대했습니다. ‘여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이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굶기시거나 까망 눈을 만드시겠소. 또 설사 그렇게 하신다 하여도 무슨 뜻이 있으실 것을 못 믿겠소! 당신이 그렇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신이오.’ 아내는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이 야속해서 울고, 남편은 말씀을 함께 따르지 않는 아내가 서운해 좁은 길 가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남편은 깊은 밤 기도처를 찾아 산으로 올라가고 다음 날부터 금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에도 밥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한 후 결국 절반의 땅을 처분하여 구제했습니다. 한편, 그는 24회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고 25회 노회에서 다시 유임되었습니다. 왜 이 일을 맡게 되었을까 괴로워하며 고민하다가 이제 시작될 신사 참배 문제에 눈을 뜨고 노회와 교회들이 영적 전쟁할 준비를 시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주 목사의 제의로 경남 노회가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한 뒤로 경남 일대의 교회는 뜻을 같이 하기로 단단히 결속했습니다.
“신사 참배는 10계명 중 엄연히 제1, 2 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우리는 계명을 어기고는 살 수 없음을 천명하여 일본이 받드는 신사 앞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주 목사는 신사 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신앙을 짓밟으려는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주 목사 부부는 셋째 아들 영묵이를 홍역으로 잃은 지 3년이 채 안 되어 딸아이 영덕이도 잃었습니다. 주 목사는 자식들의 죽음이 무슨 예표인가 묵상했습니다. 몇 주 후에 문창교회 청빙위원들이 찾아왔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며 섬기던 초량교회 목회 5년 반 구봉산 기도처에서 주 목사는 날이 밝도록 엎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 목사는 초량교회의 사임의 뜻을 밝혔고, 초량교회의 온 회중이 눈물바다를 이루며 끈질기게 만류했지만 주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제 헤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전장으로 떠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이 발걸음은 영적 전쟁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될 것이오, 우리가 각기 헤어져 가는 그 자리는 주님이 함께하시는 영적 전쟁터인 것이오.”
1933년 암울한 기운은 점점 무겁게 조선 땅을 짓눌렀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일본은 북벌을 꿈꾸면서 조선 땅을 군수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문창교회 문제를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해결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높은 영적 기갈에 허덕이던 교인들은 다시금 맑은 물을 얻게 되어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안갑수 사모와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려다 병이 나서 포기된 후 의신여학교의 교사가 된 오정모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있는 주 목사의 단호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역, 사랑, 학식이 다 구비되어 있어 나날이 그는 문창교회에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돌연 안갑수 사모가 큰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하는 것이 잘못되어 결국 살 가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안사모는 평소 형님 아우로 흉허물 없이 지내던 오정모 선생의 손을 잡고 “아우님, 어머니와 아이들을 부탁해요. 목사님을 도와드려요. 제발 부탁이에요.” 하며 한없는 눈물을 쏟고 몇 마디 고백을 남긴 채 1933년 5월 19일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졸찌에 아내를 땅에 묻고 돌아선 그에게 미처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무거운 숙제를 풀어야 할 일이 주어졌습니다. 1933년 7월 3일 경남노회는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라는 순육설과 10계명 무용설을 주장하는 신진리파에 대한 정죄 여부를 가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장로의 아들이오, 주일학교 교사요, 찬송 지도자 선생이 여자 회원과 함께 기도한다고 교회에서 소등하고 밤을 새우고 교회에서도 오만불손하여 목사님에게 책망을 여러 번 듣고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결국 책임을 맡고 있는 소년 멜레회 지도자를 면직시켰고, 그 치리 사건은 적잖은 파동을 몰고 왔습니다. 그 후 자기를 초량교회 취임 목사로 청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선배 장덕생 목사가 교리 해석을 제멋대로 만들어 새 교파를 형성하고 나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권징 조례에 따라 그 이름을 노회 명부에서 제명해야 했습니다. 비록 잘못이 있다고는 해도 한 교직자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야만 하는 노 회장 주 목사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정말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의 법이오, 교회의 법을 따라 결정한 일이기는 하지만 인정이 무엇인지, 그것을 칼로 자르듯 끊어내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평평한 바위 위에 꿇어 엎드린 그의 숨결은 그대로가 신음이었습니다. 살아있음의 의미, 나머지 식구들을 이끌고 가야만 하는 의미,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 두 아이의 죽음, 제명 책벌 한국을 키질하듯 들볶는 일본, 이 땅 곳곳에 세워지는 일본의 신사. 주님을 찾는 그의 울부짖음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새벽녘에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재단은 높은 곳에 있느니라, 재단을 오르려면 계단을 밟아야 하느니라.’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재단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재물이 되기 위해 육신에 속한 애정과 욕망을 끊어내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주님 저를 재물로 받고자 하심입니까? 오, 주님 두렵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제가 어찌 감히 재물이 되겠는지요.’ 그는 그 주일에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과로의 영양실조 10여 일간 호되게 앓고 난 후 민망할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1934년 목사님의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자 재직들이 재혼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모두의 이야기가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고, 여러 가지 면으로 봐서 오정모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 선생은 주목자를 성직자로 존경하며 사모했으므로 그 동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야멸차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였는지 며칠 후 오 선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다 말고 쓰러졌습니다. 진찰 결과 결핵성 복막염이었습니다. 이미 뱃속에 고름이 너무 퍼져서 수술도 퍽 힘들었습니다. 의사들은 오 선생이 살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조금씩 호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 선생은 정신이 들자 주 목사님과 결혼을 단순히 사람의 재혼이라고 단정짓고 거절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던 자신의 오만과 불순종을 한없이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살아있음은 목사님을 돕는 배필이 되라는 뜻으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의 처분대로 하겠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이어주심이 바로 그 일을 맡으라 하심을 지금 알았습니다.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습니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일제히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 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며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엘리아의 권위, 예레미아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가 되었습니까?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낮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그러나 미처 그 대목의 말을 맺기도 전에 장내를 찌를 듯한 제지의 소리가 단상을 가로질렀습니다. 단상은 일경들과 목사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 모두가 일경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 그 밤을 지내고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던 몇몇 목사들에게서 일본 순회전도 강연을 부탁받아 한 달 이상 전도 강연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그를 청빙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 무악산으로 올라가 엎드렸습니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왜 남쪽 끝에 있는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그날 밤 오정모 사모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 목사 부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얻고 순종의 길로 나갔습니다.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이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 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신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으니 순수한 신앙을 이끌고 지켜갈 일이 간단치 않을 것을 예상하며 주 목사는 산정현 교회 안에서 먼저 영적 전투를 시작할 결심을 했습니다. 일본도 이에 맞서듯 주 목사가 산정현 교회로 부임해 온 그 시기에 악명을 떨치는 군인 출신의 미나미 지로를 서둘러 조선총독으로 내보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 교회 교인들에게 밝기 전했습니다.
그리고 산정현 교회가 신사 참배에 대처할 사항들을 말했습니다.
첫째, 일본의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동시에 범하는 일이오, 둘째, 신사를 참배하는 교인은 지위나 신분을 불문하고 공개 제명 출교시킬 것이며, 셋째,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주 목사가 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리를 함께한 재직 전원이 마음으로 각오를 새롭게 하며 주님께서 주기철 목사님을 산정현 교회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부임하면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떼를 보일 속셈이었습니다. 10월 1일 총독부는 소위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급 학교에 일본 천왕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집집마다 가미다나를 설치시켰고, 평양에는 곳곳에 신사가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하게 절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경죄라 하여 잡혀갈 판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학교마다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호주 선교부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남을 알아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여 미션 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기독교계 잡지에 소위 황국신민의 선서라는 글이 실리고, 기독교보에는 기독교인의 국가 봉사라는 제목의 사설, 그리고 기독교 잡지에도 일본 황실에 순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성경 말씀과 위배되며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고까지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산정현 교회 예배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순결을 지키기 위한 뜨거운 부르짖음으로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주기철 목사 부임 후에 산정현교회 교인은 6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당을 신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갔습니다. 세상이 뒤숭숭할수록 우리들의 신앙 근거는 든든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 부여 사는 집은 고대광실이면서 예배 처소가 이렇게 초라해서야 어떻게 일본과 맞서서 신사 참배 문제로 당당하게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주일 오후 당회로 모인 자리에서 건축 예산 5만 5천 원에서 4만여 원의 헌금이 자원하여 거쳐졌고, 이 소문은 시중이 들썩할 만큼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확신했습니다. 1천여 평 대지 위에 본당 250평, 종실 150평에 식당과 당회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산정현 교회 헌당예배가 2월 8일 화요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53회 평북 노회가 2월 7일이었습니다. 평북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자비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 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 졸업 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헌당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주 목사를 끌고 갔습니다.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 목사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장로님 이제 시작입니다. 헌당 예배를 방해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산정현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는지 확신케 하는 사건으로 아십시오. 장로님 염려마시고 예배를 잘 마치십시오.”
눈물과 침통 속에서 헌당예배는 예정대로 오후 2시에 드려졌습니다. 학생들 10여 명, 산정현 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드린 후 2월 9일 조선의 공교회로서는 처음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습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오정모 사모와 성도들은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 주 목사는 4주 만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전국 24개 노회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식은 하루가 바쁘게 들려왔고,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있던 날 주 목사는 방문을 닫고 숨소리도 없이 홀로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동료 목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주 목사의 방문을 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평양 신학교를 짓밟은 자들이 모란봉에 세운 일본 신궁 텃밭에 평양신학교를 새로 세우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와 서울혁신교단은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내각에까지 직통으로 통하는 세력 단체로 커져 산정현 교회의 새벽 기도 내용까지 일일이 그 친목회에 밀고하고 있었습니다. 동료 목사들은 분노하며 “목사님, 그런 인간들을 그냥 두고 보실 작정입니까?” 하고 묻자 주 목사는 고요하고 슬픈 눈으로 “우리에게는 그들을 치료할 권한이 없어요. 다만 우리에게 그러한 배역을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드릴 일 밖에는. 두려운 것은 이 땅 이민족이 겪게 될 죄이지요. 이미 이민족은 엄청난 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혹여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쌓여 있는 죄를 조금 덜어주시지는 않을까 바랄 뿐이지요.” 세 사람의 대화는 그쯤에서 흐느낌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주 목사의 제의로 모두 묘향산으로 기도를 떠났습니다. 세 사람의 통곡과 부르짖음은 산을 흔들고 밤하늘을 흔들었습니다. 주 목사 일행이 묘향산으로 떠나신 날, 일본이 파견한 일본 기독교회 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가 총회를 앞두고 회유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4개 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하여 모은 100여 명의 목사와 임원들이 성대한 환영 만찬으로 맞이한 후 모임 장소를 산정현 교회로 정했습니다. 주기철 목사 일행은 묘향산에서 평양에 도착하여 금식을 하던 그대로 산정현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도미다는 깍듯한 태도와 싹싹한 말씨로 신사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한 단호함과 의연함으로 도미다 목사를 향해 질문하면서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도미다 목사께서는 10계명을 외우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언제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면, 도미나 목사께서는 조선을 불법으로 점령한 일본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불법을 함께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도미다 목사님, 목사님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그리고 진정 조국 일본을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를 참배하라고 권고하며 다니시기보다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에게 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신앙 양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일본도 한시 바삐 여호와 앞으로 돌아와 더 큰 일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무릎꿇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도미다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쓴 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주 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그 간담회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결국 도미다 목사의 패배로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에서 간담회로 밤을 지새운 날 저녁, 선교부로부터 도미다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이 벌어졌고, 도미다는 4개 노회 신사 참배 가결의 선물을 안고 일본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주 목사는 저녁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사모가 무겁게 닫힌 방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서니 책상 위에 펼쳐진 백지에 쓰여 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주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내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책상 앞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주 목사의 곁에서 주님도 함께 울고 계셨습니다. 천지간의 마음도, 몸도 부칠 곳 없는 영혼의 외로움과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도미다 목사의 한국 방문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위한 선무공작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은 27회 총회에서 조선교회의 신사 참배를 가결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고 있었습니다. 1938년 7월 초복 더위가 땅을 절절 끓게 만들던 날 사복 경찰 몇 명이 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쳐 영장 제시도 없이 창백해진 목사를 무조건 끌고 나갔습니다. 총회가 열리기 전 신사 참배 반대 안건을 들고 나올 주인공이기에 주 목사를 묶어두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시미즈가 형사는 막상 주기철 목사를 구속해 놓기는 했으나 죄목을 잡을 수가 없고 모두들 존경하는 터라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성읍 경찰서의 고등계 계장 악마의 화신이라 불리는 나아 형사 밑에서 훈련받은 배만수 형사가 평양에 왔습니다. 배만수 형사는 의성교회를 뒤지다가 유재기 목사가 기독교 청년 면녀회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잡아 가두며 관계된 목사들을 의성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 농우회는 5년 전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유회에서 출발한 농촌 계몽운동이었는데, 회장이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요,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추적한 것입니다.
8월 10일 평안남도에 있는 장로 교회들이 너도 나도 앞장서듯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를 들으며 의성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도착은 고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검도용 몽둥이가 자주 부서졌고, 앉혀놓고 진니기는 매질이 지루해지면 천장에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비행기를 태웠습니다. 낭하와 배영사, 문형사가 차례로 지하 고문실을 드나들었습니다. 주 목사를 거꾸로 메워 달아놓고 고춧가루를 가득 푼 주전자 물을 코와 입으로 쏟아부었습니다.
극심하던 고통은 순간 끊어져 무의식 속에 빠졌고, 고춧가루 물고문은 숨통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혈관도 타 붓게 만들었습니다. 주 목사는 감방에 있던 청년이 내미는 밥덩이를 간신히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마치 완전히 버림받은 자 같을 뿐이오며 갈 곳이 아주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겠고 희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 성찬으로 받사오니 주님께서 저와 함께하심을 확증하게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한 입 베어물은 밥덩이는 그의 목구멍을 찢으며 넘어갔습니다. 목구멍은 밥 한 덩이를 넘기면서 전신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순간 그의 영혼은 불빛을 만난 듯 밝아졌습니다. 터지고 깨어진 그의 전신으로 기쁨의 전류가 번개처럼 흘렀습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비한 힘이 얹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고난이 깊을수록 정금처럼 빛나는 생명과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