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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귀용 / 모진 고난 속에 핀 고귀한 꽃. https://youtu.be/0rbL7kW1tPg
잔느 귀용은 1648년 프랑스의 루이14세 때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보다 사교계나 자선 사업에 관심이 더 많았던 어머니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하녀의 손에 맡겨져 하루 종일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어머니는 귀용에게 관심이 없었고 아들만 심하게 편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귀용이 아플 때도 좋아하는 것을 동생이 달라고 요구하면 빼앗아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한 번은 선교 차 베트남으로 떠난 사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의 문제를 두고 슬픔으로 밤새 울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모든 죄를 크게 뉘우치며 눈물로써 회개 하였습니다. 이후 내면의 변화는 점점 깊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은 아주 작은 실수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불쾌감을 끼친 일이 있으면 그 상대가 가족이라도 심지어 하인이라도 겸손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영성 서적 [그리스도를 본받아], [샹딸 부인의 생일] 같은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은 샹딸 부인이 ‘주의 이름을 너의 가슴에 새기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인두로 가슴에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몹시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종이에 예수님의 이름을 써서 네 군데를 꿰매어 살가죽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수녀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반대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큰 상처가 되었고. 심령 안에서 싹트던 은혜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제 잔느귀용은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로맨틱한 소설을 읽기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밤을 세울 정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가끔 쓰라린 슬픔에 젖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의 은밀한 임재를 기뻐하던 때와는 너무도 다른 자신의 상태를 보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귀용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12살 때부터 청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여러 사람의 청원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의 청원을 받아들였는데 상대방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 후 남편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이 자신의 초상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는 귀용을 성화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혼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이전에 모든 생활 태도를 바꾸어야 했습니다. 우아함과 귀족적인 생활습관이 몸에 베인 그녀의 예의 바른 행동에 시댁 식구들은 교만이라고 여기며 누구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단을 쳤습니다. 더욱이 괴롭힐 심산으로 굴욕적인 일을 시키는 일이 다반사 였습니다. 친정집에 대한 비난은 물론 부모님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자주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시어머니와 남편은 아랫사람들보다도 더 학대 했습니다. 하루 종일 시어머니 방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고, 심지어 카드 놀이를 하면서도 감시했습니다. 그녀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몇 시간 동안이나 불같이 화를 내곤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생기발랄했던 그녀를 점점 더 백치미와 같은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귀용은 아주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어머니와 동행하지 않고는 밖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시어머니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가 자신의 신복인 하녀를 붙여 놓았기 때문에 고통은 더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죄수마냥 늘 지켜보게 하였고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는 듯 했습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감시를 피할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을 인내로 견뎌야만 했습니다. 식사 때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항상 혼란스럽게 했고 이로 인해 눈물을 훔쳐야만 했습니다. 아무도 고통과 쓰라림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정 어머니에게 조차도 위로는 커녕 자신의 사정을 약간이라도 말하면 또 다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워진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의 죄를 통회하는 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행했던 모든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참회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세속적인 소설뿐만 아니라 영혼의 해가 되는 모든 무익한 책들은 치우고 유익한 책들만 남겨두었습니다. 끈질긴 기도를 드리며 더 이상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되살아났습니다. 어둠이 서서히 거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허영심과 자기 만족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에 대해서 탄식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종종 집안의 하녀들마저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하기 때문에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더 애절하게 주님을 찾기 시작했고 주님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거칠고 메마른 광야인 가정에서 주님의 율례를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첫 아이를 가지자 가족들은 커다란 관심을 쏟으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십자가는 어느 정도 완화된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출산하자 염려와 관심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 허약해져 수주가 지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됨에 따라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았습니다. 자신의 용모로 인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에 쾌감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나가 허영심을 뽐내며 돌아다녔고 손을 보이기 위해 장갑을 벗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집에 와서는 고통스럽게 울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으로 어느 호텔에서 묵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인들은 그녀를 보고 경쟁하듯 시중을 들었고 외모와 행동에 대해 격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굴욕감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이따금 남편은 저녁 식사를 창문 밖으로 던지려 했고 귀용은 차라리 자신을 때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시어머니는 더욱 표독스러운 말로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네가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 니가 온 후로부터 집안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단 말이야. 네가 이 집의 저주라고 알겠니.” 이제 그녀는 머리 모양을 평범하게 바꾸고 화장도 하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허영심을 누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통은 그녀 안에 있는 허영심을 잘라내는 촉진제였습니다.
그러던 중 부친의 권유로 성 프랜시스 회에 속한 경건한 수도자 한 분을 만나서 기도할 때의 어려움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부인, 그것은 부인께서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권면을 해 주었습니다. 이 말은 한 줄기의 빛이 되어 깊은 어둠을 뚫고 마음 깊이 박혔습니다. 비로소 수년 동안 찾아다녔던 내면의 강한 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혼 안에 계신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큰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좋아했던 것은 거절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던 것들을 취했습니다. 매우 까다로웠던 식성도 원만해져서 거의 아무 것이나 먹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난한 병자들을 돌볼 때 상처나 종기를 치료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묵묵히 그 거리끼는 환경 안에 자신을 내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점차 이 일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지고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다만 주권자께서 전적으로 통치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었고 늘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냉대와 모욕은 여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원치 않는 환경일지라도 묵묵히 견뎌 나갔습니다. 그들이 화가 났을 경우에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어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심지어 하녀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 날 시중을 들던 하녀가 거칠고 무례하게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악의 뿌리가 더 깊이 뿌리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말했습니다. “내가 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네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 앞에서 너에게 야단치며 모욕을 주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너의 주인이다. 내 행동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야!” 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녀는 즉시 바깥주인에게 달려가 하지도 않은 말까지 꾸며가며 고자질을 했습니다. 병원 중에 있는 주인을 계속 돌보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너무나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하면서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성난 사자와 같이 달려와 불같이 화를 내며 목발을 치켜들고 내리칠 듯 위협했습니다. 이에 전혀 요동치 않고 침착하게 가만히 앉아 있자 이내 남편은 목발을 던지며 마치 악인을 대하듯 온갖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주님 안으로 깊이 잠겼습니다. 그때 하녀가 들어오자 남편은 더욱 화를 내며 용서를 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기꺼이 용서를 빌자 남편은 화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할지라도 즉시 성령님의 음성을 따랐기에 하녀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잔느 귀용은 친구와 만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안에 주님과 깊이 연합되어 다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서 이야기해도 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 고의 신부에게 이야기하자 신부는 공공연히 비방하며 착각에 빠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 신부의 의견에 동의하며 기도와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내면의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온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했어도 무엇을 먹었는지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먹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까지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를 못했습니다. 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시로 인하여 어머니 방이나 남편의 침대 곁에서 자리를 뜰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육체와 달리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귀용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몇 시간 동안이나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주님을 생각하며 묵묵히 참았습니다.
더욱더 엄격한 규칙 생활을 하면서 모범적인 경건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무렵 한 가지 은밀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 뜻대로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고자 하는 갈망이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제가 어찌 주님께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저를 그냥 놔두지 마옵소서!”
시련의 끝은 어디일까요? 온 집안에 천연두라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습니다. 어린 딸뿐 아니라 큰아들 역시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흉하게 변했습니다. 급기야 친정에서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오라고 연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귀용을 집 밖으로 피신시키라고 시어머니에게 간곡히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자 그들은 귀용이 피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귀용은 그들에게 시어머니에 대한 말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그들의 수근거림과 비방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기를 매 순간 기다리면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둘째 아들이 더 염려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큰아들을 맹목적으로 애지중지했고 귀용과 둘째 손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남편에게 위가 아프고 천연두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는 단순히 상상일 뿐이라고 대꾸했습니다. 어느새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머리와 위에 굉장한 통증이 느껴졌고 오한이 났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귀용이 아픈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병이 상당히 진전된 후에야 귀용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폐 염증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방은 천연두를 막기 위한 처방과 정반대였습니다. 의사가 다급하게 수혈이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시어머니는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자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신뢰하는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가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신뢰하는 의사조차도 부르러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용은 어떤 말도 어떤 작은 동요도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녀를 은혜로 강력하게 붙드셨습니다. 고통을 잊을 만큼 커다란 평안을 누렸습니다. 주님의 보호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때마침 과거에 그녀를 치료한 적이 있는 의사가 집 앞을 지나가다가 사람들로부터 상태를 듣고 즉시 보러 왔습니다. 그 의사는 직접 상태를 목격한 후 깜짝 놀라며 환자가 피가 모자라 죽게 되었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화를 내며 시어머니를 엄하게 나무랬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신뢰하는 의사가 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며 완강히 맞섰습니다. 의사는 급한 대로 자신의 피를 귀용에게 수혈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저녁에 한 번 더 수열을 해야겠다고 말했지만 시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수열을 했더라면 병세는 훨씬 더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가 부족하여 건강 상태가 다시 나빠졌습니다. 천연두로 인하여 눈에 염증이 생겨 고통이 매우 컸습니다. 2 3주 동안 엄청난 통증에 시달려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었습니다. 목과 입천장과 잇몸은 헐어서 국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물을 삼길 때에도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몸 전체가 문둥병 환자 같았습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런 끔찍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설명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자주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던 외모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림으로써 이제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의 신부가 방문하여 천연두에 걸린 것이 슬프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슬프지 않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리어 신부는 교만하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막내 아들도 귀용과 같이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약함 가운데 힘을 얻고 하나님께 막내아들을 바치며 욕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것이오니 제게서 취해 가시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곱고 아름다웠던 얼굴이 울퉁불퉁 깊이 파이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미모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천연두로 얽은 자국을 메우도록 하기 위해서 포마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기에 사용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만일 내가 너를 아름답게 하려고 했다면 내가 너를 다시 전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공기는 상처를 더욱 심하게 만듬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모든 처방을 옆으로 치워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로 인한 교만의 단단한 깃을 꺾고 굴욕으로 승리하기를 원했습니다. 천연두의 흉터 자국이 더욱 심해져 밝갛게 되었을 때 거리에 나가 자신을 노출시켰습니다. 남편은 더 이상 귀용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누렸던 즐거움을 다시는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용은 마침내 승리자가 된 듯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천연두로 인해 첫째 아들을 잃는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1672년 7월 부친과 딸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다가 크게 의지하던 수녀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어느 때보다도 큰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거의 7년이란 세월을 완전히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상태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공허하고 어둡고 무력한 상태는 그때까지 겪었던 실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전처럼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하늘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고 아무런 위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존재로부터 버림을 당한 채 어느 곳에서도 피난처를 발견하지 못하는 습니다. 마치 자신이 지옥을 위해 계획된 희생물로 여겨졌습니다. 참회와 기도와 순례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오히려 마음의 병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이 음료수요 슬픔이 음식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면의 고통이 깊은 만큼 영혼은 더 견고해져 갔습니다.
1676년 그토록 온갖 박해와 수모와 고통을 주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겪었던 십자가의 무게가 가벼워지려나 하는 일말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더 무거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녀의 냉대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격해졌습니다. 지도 신부에게 조차도 버림을 받은 그녀는 이복 오빠인 라모트 신부와 합세한 여러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남편과의 사별 후 여러 사람들이 청원을 해왔습니다. 시어머니는 재혼을 못하는 것은 아무도 청혼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비방을 하였습니다. 기용은 모두 거절한 사실을 전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한 겨울에 아이들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시댁을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피조물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헛됨을 알았기에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기쁨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어느 날 라 콩부 신부로부터 꿈에 귀용이 제네바로 가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는 전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자신의 심령 안에서 생명이 회복되기 시작함을 느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제네바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침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무엇이든지 생명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그 명령을 따르겠다는 결심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녀는 주님 안에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평온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 무렵 기용은 파리에 와 있는 주교를 만나서 자신이 제네바로 가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기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제네바 근처에 제스에 형성되고 있는 뉴 가톨릭 공동체를 소개하였습니다. 귀용은 신부님들의 조언과 성도들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무렵 신기한 꿈을 여러 번 꾸었지만 그 꿈들은 십자가와 박해와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귀용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난한 이웃을 위해 꾸준히 헌신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인이 기용에게 길가에 한 가난한 병사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 병사를 데려다가 장소를 따로 마련하여 보름을 넘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했습니다. 그는 설사병을 앓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군대를 나온 것이었습니다. 심한 악취가 났기 때문에 동정심이 많은 하인들마저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 가려 할 때마다 적어도 15분은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전에도 가끔 가난한 사람을 집에 데리고 와서 그들의 썩은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아주곤 했지만 그 병사의 상처처럼 끔찍한 것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병사는 귀용이 간호해 준 지 보름 만에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딸과 두 하녀만 대동하고 1681년 제스에 도착했습니다. 뉴 가톨릭 공동체의 집은 아직 담도 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딸이 너무 쇠약해져 귀용은 딸을 수녀에 맡기고 다시 뉴 가톨릭 공동체로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님의 섭리였는지 귀용은 그곳에서 의사가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할 정도로 심하게 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특히 사무장 순야는 너무 인색하여 생명 유지에 필요한 필수품조차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을 전부 희사하고 수중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던 그녀의 희생적인 삶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들은 라 콩부 신부에게 귀용이 많이 아프니 와달라고 회신을 보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라 콩부 신부는 밤새 걸어서 뉴 가톨릭 공동체에 도착한 후 즉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경을 헤매던 그녀가 놀랍게도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사망을 선고했던 의사도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당신의 딸을 그렇게 회복시키고 만인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귀용의 생애 전부를 고스란히 높여주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사랑한 만큼 귀용 부인은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모든 죄, 과거나 현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구세주를 성령의 힘으로 증거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포했습니다. 그분의 성령은 온유함 친절함 오랜 연단 정결함 거룩함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설파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규정한 기도 형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부인의 메시지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 기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의 교리와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냐고 비난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이양한 프랑스와 교회 당국은 교회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여인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기용에 대한 험담을 은밀하게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그녀와 친했던 라콩부 신부까지도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주교의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던 그녀의 의붓 오빠 라모트 신부를 끌어들여 비용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귀용에 대한 악담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명 없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고난 받는 것조차 영혼의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네바의 주교는 귀용에 대해 어떤 이들에게는 호의적인 또 다른 이들에게는 악의적인 편지를 보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편지들을 2년 동안 보관하다가 주교가 해를 입지 않도록 전부 불태웠습니다.
귀용은 라 콩부 신부의 말을 듣고 파리로 향해 가다가 그르노블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유익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거야 귀용은 남은 재산을 빼앗으려는 라 모트 신부와 라 콩부 신부를 해치고자 하는 성직자들의 계략에 의해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왕에 의해 라콩부 신부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고 1688년 귀용은 이교도 광신자라는 죄목으로 성 마리아 수녀원에 갇혔습니다. 간수 수녀는 그녀를 미치광이 위선자라고 부르며 괴롭혔습니다.
그 후 더 깊은 감옥에 갇혀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다가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도 밖도 여전히 시련의 땅 이었습니다. 그녀는 하인이 준 독약을 먹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으나 7년이 넘도록 후유증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녀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는 단 한 순간도 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파도처럼 덮쳐도 묵묵히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그녀 안에 머물기를 원했기에 극한 시련의 불 속에서도 그녀는 행복했습니다. 1695년 귀용은 다시 체포되어 빈센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감옥 안에서도 자유했고 평안하였습니다. 참된 평화는 밖으로 흘러넘쳐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시중 들던 하녀조차도 그녀가 즐겨 부르는 찬송을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 후 바스티유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유럽 대륙의 다른 어떠한 감옥보다 훨씬 악날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잔혹한 파리의 겨울에도 난로나 화로 하나 없었습니다. 빈대와 이, 거미와 쥐만이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하수구에서는 썩은 악취가 올라와 참을 수 없게 했습니다. 매스꺼움, 설사, 벌레물림, 종기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아플 때는 자기 오물과 구토. 배설물 위에 언제 일어날 수 있을지 기약 없이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용은 바스티유에서의 생활을 짤막하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보여줄 구경거리로 삼기를 기뻐하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그렇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바스티유에서 나왔을 때 이 세상에서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나 귀용 부인은 진실로 부유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련이 끝난 후 나 자신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정결해졌음을 깨달았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하나님을 소유했다.” 시련의 도가니 속에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산 삶은 놀랍게 변화 되었습니다. 생각이나 욕망에 있어서도 투명하고 솔직했습니다. 모든 삶 속에서 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진실하게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며 자기를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모든 인간을 용서하고픈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717년 6월 9일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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