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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맨발의 성자 이현필, 한국의 프란체스코. (글과 동영상)

  • 이은아 목사
  • 2021-11-19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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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성자 이현필, 한국의 프란체스코.

https://youtu.be/6KceCn897jw

 

 

이현필은 19131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아버지 이승록 어머니 김호산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지혜로와 주위의 기대 속에 자라났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 가면서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살던 집이 남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이 선생은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인 옛 집을 사기 위해 읍내로 닭 장사를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처음, 교회에 나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세종 선생을 만나면서였습니다.

 

이세종 선생은 보통 이공(李公)이라 불렀는데 그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초야에 묻혀 복음의 말씀대로 살다간 인물이었습니다. 살생을 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추구하며 일제시대 때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실천하고자 많은 철저한 삶을 살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쫓아 사방에서 모인 청년들이 날마다 성경을 배웠고 빛 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세종 선생의 순결 사상은 이현필 선생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이 시절 이현필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21살 때는 광주 재매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빛된 삶을 철저하게 살고 싶은 열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그는 그 후 도암 화학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인간적인 애정을 부인하는 수도 생활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생은 그 십자가의 길을 오직 순교적인 정신으로 임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세상 사람들로는 생각지도 못하는 고민과 치열한 내적 싸움이 있었으나 그는 깨끗하게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평생을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나이 30세 전후 수년간은 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 생활을 하였습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며 지내던 이 선생은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이라는 산중에서 기도하였고 그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이곳이 바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요, 말구유였습니다.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우려는 이들이 서리내 깊은 산 속에서 이 선생의 인격의 감화를 받으며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등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서리내에 사는 동안 이 선생은 쌀가루에 물을 타서 마셨으며 주로 생식을 했습니다.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굶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보름씩 산중에서 받는 교육은 경건 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병행되었습니다. 서리내에서 앞산을 타고 내려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강의를 들었으며 특히 이 선생의 순결 사상을 전수받던 곳입니다. 이렇게 갈보리는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뒷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집신을 신었고, 산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으로 불을 떼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 선생의 식생활은 일식주의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습니다. 또한 은혜 받은 일이 많았지만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습니다. 다만 성경을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습니다.  간혹 누가 병이 들어 기도 받기를 원하면 저는 신이 아닙니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는 더 아프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나 실현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복 있는 신앙인데 고통 중에 인내함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을 닮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려는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금욕주의자 산중파로 부르며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이는 이것이다! 이 길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날 이 선생이 뒷산에 올라가 철야 기도를 드리고 새벽에야 하산해서 초막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엉겨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습니다. 순교자 같은 처절하고 엄숙한 모습을 바라볼 때 사람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하산에서는 떠오르는 아침 햇볕 쪽을 향하여 몸을 녹이면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뭐라 형용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이 일었다고 제자들은 증언했습니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가득히 내려덮인 설경을 보며 수도 생활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 라고 호소하곤 했습니다.

 

이현필은 서리내에서부터 훈련해온 제자들을 중심으로 탁발 수도단을 만들어 전남 광주에서 출발하여 순천 여수 평일도 해남 강진 보성 등으로 순회했습니다. 이현필은 쓰레기를 줍고 남의 집 문전에서 걸식하는 탁발 훈련을 통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는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걸식하였고 제자들에게도 그 훈련을 시켰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가서 “밥 한 술 주십시오.” 하면 사람들은 밥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편안히 집에서 살 텐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으로 예수님과 같은 겸손을 소유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며 탁발 전도에 임했습니다. 이렇게 탁발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서로 경과보고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맨발의 평화, 무소유의 기쁨과 자유 바로 예수님으로 채워진 감격과 사랑 그것이었습니다. 탁발은 교파 교리 의식 신학 등의 의상을 입기 전에 순결하신 나사렛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고 방탕과 사치의 교회를 경건 운동으로 건져내고자 하는 특별 훈련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일찍이 탁발 수도를 감행했으며 예수님처럼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을 감화시켰습니다. 빈농을 돕고 가난한 겨례와 함께 울고, 병자가 있으면 몸소 간호하는 사랑의 탁발 전도였습니다. 이 같은 헌신 운동과 전도를 통해서 재산, 지식, 재주, 힘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내 자신을 바치라고 요청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현필의 제자들은 철저히 모든 것에 예수님의 정신이 깃들인 생활을 훈련받았습니다. 침묵 속에 고요한 묵상, 몇 시간이고 무릎 꿇는 기도의 자세,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부르는 찬송, 검소한 무명 옷차림, 고무신, 거지 음식보다 못한 최하의 조식, 그런 음식조차 선생의 훈련에 따라 땅에서 먹는 겸손, 아무 장식이 없는 숙소, 소박하고 검소하며 일체의 형식을 초탈했습니다. 개인의 소유란 없었습니다. 또한 낮고 천한 곳 사람들이 살지 않는 쓸쓸한 공동묘지 근처가 아니면 산기슭 혹은 38선이 가까운 계명산 앵무봉 밑에 위험하고 고독한 장소를 택하여 세상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의 삶만을 담으려 매진하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쳐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말씀처럼 일생 가난과 함께 육신의 평안을 거부한 채 사셨던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그대로 단순하게 따르고자 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이현필의 24시간은 기도 생활이었고 기도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해가 지면 거의 자리에 눕지 않고 들에 나가 이슬을 맞으며 밤새 묵상했습니다. 제자들이 방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보면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각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제자가 “선생님! 모기가 많은데 낮에 기도 드리시지요.” 하면 기도는 하는 게 아니라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주님과의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에 몰입하였습니다. 이러한 극도의 청빈 속에서도 밤늦게까지 찾아와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일일이 다 들어주고 그들을 보낸 뒤에는 하루 한 끼 하던 식사도 그만두고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깨닫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선생의 제자 중에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3개월간 깊은 산 속에서 작정 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지리산의 1월 눈이 산처럼 덮이고 먹을 것도 없는 매우 어려운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찬송가 소리가 나기에 천사인 줄 알고 허리 굽혀 급히 나와 보니 하얀 눈 속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이 서 있었습니다. 눈 덮인 깊은 한밤중 잘못해서 빠지면 몇 길이나 되는 눈덩이에 빠져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지리산 길입니다. 이 선생은 그 험한 눈길을 고무신을 옆구리에 끼고 맨발로 걸어온 것입니다. 다 와서는 기도하는 제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밖에서 찬송을 부르며 맨발로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방에 들어온 이 선생은 품 속에서 간직한 것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둥그란 떡 세 덩이었습니다. 당신 몫으로 받은 것을 산속에서 굶고 있을 제자를 생각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훗날 제자는 고백하기를 저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볼 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선생님의 삶 속에서 풍겨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거짓 없고 진실하며, 예수님과 같은 참사랑을 계속 실천할 수 있습니다.” 라고 그는 간증하며 울었습니다. 이처럼 이 선생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지극한 사랑을 모든 이에게 실천하고자 애쓰며 살았습니다.

남원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떡을 많이 해서 제자 몇몇과 나병 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이 선생은 곪아 터져 진물이 나는 손을 꼭 잡고 안수하며 문안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자기네 손을 잡아주는 일이 너무도 황송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병은 다섯 번 뒤집어진답니다.” 하고 절망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이현필은 형님! 형님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나병이 났지만 이 죄인은 보이지 않는데 병이 더 심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극한 겸손과 사랑에서 나오는 진실한 위로 그것은 작은 소자 상하고 찢긴 소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산 증인 된 모습이었습니다.

 

어느새 겨울 눈이 몹시 오는 밤, 이현필 선생과 제자 김준호는 불을 떼지 않아 뼈가 저리는 차가운 방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다 떨어진 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손에 깡통을 차고 하루 종일 구걸하러 다니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지만 하룻밤 따스이 쉴 구석도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마련되지 못한데다가 냉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밖에는 눈이 하염없이 오는데 밤 10시가 지났을까, 그때까지 묵묵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현필 선생을 보니 불쌍한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고 계신 눈치였습니다. 눈 오는 밤 배고픈 사람들의 서글픈 얼굴들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제자 김준호는 오늘 밤 거리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를 돌보고 오라는 스승의 음성을 가슴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리 밑에 가보니 가장 불쌍해 보이는 3명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돌아온 그는 이 선생에게 거지 아이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생은 자신의 몫에 이불 한 자락을 선뜻 내어주며 가져다주라고 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이불을 들고 다리 밑에 거지에게로 갔지만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처지도 불쌍한데 다른 이를 돌보려는 선생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아이를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끓어올랐고 그 아이가 죽기까지 간호하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알 수 없을 것 같고 이해되지 않을 것 같던 스승의 행동들은 사랑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그 자리에서 큰 감동으로 깨닫게 되는 체험을 매번 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주님의 고난에 몸소 동참하기 위해 행한 잦은 절제 생활 때문에 여러 번 입원하였습니다. 제자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고 시험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에 애통하다가 각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약한 영혼을 특히 아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든지 작은 일에 사로잡히는 사람을 볼 때는 그 때문에 피골이 상접하여 밤새 앓으며 애통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삶 대부분은 지극한 예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영혼을 위한 진실한 통회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절대적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시오, 저를 지옥 밑창까지 따라와 주시면서까지 권면하시고 훈계하시고 이끌어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시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저런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의심할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이 좁은 입으로 만방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래서 그는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울고, 그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울고, 그 사랑을 실천하다가 울고,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감격한 사랑의 발자취였습니다. 오랜 기간 결핵으로 고생하던 제자 김준호를 간호하던 이 선생은 자신도 후두결핵병으로 병중에 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자 김광석이라는 분이 문병을 왔습니다. 후두결핵으로 인하여 말씀을 하기가 어려웠던 이 선생은 찾아온 제자 앞에 떡 10개를 내어 놓으며 필담으로 “잡수시오” 하고 썼습니다. 황송한 제자는 사양했으나 손짓으로 계속 권하여 한 개 먹었습니다. 그러자 또 먹으라고 권하고 또 먹고 나면 또 먹으라고 권하고 결국 내놓은 떡 10개를 다 먹자 이제야 제 배가 부릅니다라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권함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들고 지친 영혼들 소외되고 방황하는 이른 양들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병을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달아 “오! 축복하신 이 결핵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 하였습니다. 곁에서 시중 드는 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 하면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아플지라도 주위에 자신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고통 속에 들어가 그 사람과 하나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 번은 이가 상해서 송곳같이 뾰족한 끝이 긴 시간 동안 열심히 말씀하시는 이 선생의 잇몸을 찔러 구멍이 뚫리고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긴 긴 시간 말씀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까지 자기희생을 하며 남의 영혼을 위해 한 마디라도 더 가르치고자 하시는 선생의 모습은 거룩하고 눈물겹기도 했지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계속 후두 결핵으로 말을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던 때에 두 제자가 문병차 와보니 선생은 몸이 뻣뻣이 굳어져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간호하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밤이 되자 그 제자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간밤에 세상을 떠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밤중에 몰래 선생의 방문 앞까지 와서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이 선생은 어느새 이 사실을 알고 방 안에서 먼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해주었습니다. 안심한 두 제자는 되돌아와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여전히 전신이 굳어져 꼼짝도 못하고 두 눈은 충혈이 되어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선생은 필담으로 종이에 이름 두 개를 썼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걱정을 끼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이었습니다. 밤새도록 헤매는 고통 속에서도 그 제자의 일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무지한 인간들을 염려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생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선생이 방에서 각혈을 할 때 한 제자가 선생의 기침 소리가 이상하여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때 선생은 혼자 무릎을 꿇고 똑바로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각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빈 깡통을 턱 밑에 대고 선생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새빨간 선지피를 받아내었습니다. 선생은 선혈을 입에서 콸콸 토하면서도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기도해 주시오. 기도해 주시오.” 하며 거듭 청하였습니다. 그 말씀에 더욱 감격한 제자들은 기도보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떨고 서 있었습니다. “주여 제 피를 다 속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소서.” 그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고통의 표정도 없이 평화스러웠습니다. 선생님 누우시지 이렇게 앉아서 “아닙니다. 이 기쁜 시간에 어찌 제가 누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 속에는 육체적 고통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하늘의 기쁨이 서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우울해질 때 이 선생의 이러한 평화스러운 얼굴만 대하면 어느새 저절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이렇듯 선생의 임종이 가까운 곳으로 여겨졌던 때에도 선생은 생명의 세계, 은총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눈으로 보듯 동정을 지키는 것은 복입니다. 가난한 것이 복입니다. 고통이 복입니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피를 쏟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향해 멈추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 고통 아픔 근심 불안 등의 단어들을 무색케 한 것입니다.

이 선생은 고통으로 온 밤을 지새운 다음 날에 감격의 고백을 하곤 했습니다. “지난밤에 저는 주님을 만나 배웠고 주님의 만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밤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고난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승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은 곁에 있던 제자에게 “아무것도 안 보입니까?” 묻고 ‘안 보인다’고 답하니 저 빛, 저 빛이 안 보입니까?” 하며 감격해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에 넘쳐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 하며 안타까운 절규를 토해내었습니다.

 

이현필은 말했습니다. 저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 녹 듯 합니다. 조금이라도 저에게 고통이 느껴질 때면 주님이 겪으신 고통이 저를 위해 받으신 고통이라는 사실을 극히 적게나마 알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제가 겪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주님이 당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에 몇 억 분의 1이라도 하나님께서 맛보게 해주시는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게는 고통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현필 선생의 말년 후두결핵으로 무척 고생하시던 어느 가을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는 나를 업고 어디 거지굴로 데려다 주시오.”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신촌의 대피소로 이 선생은 모셔졌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처량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듯 선생은 누워 있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는 제자들 귀에는 희미하게 스승의 호흡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매면서 지내던 한 밤, 이 선생은 필담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의 태도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결론을 짓고자 하는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 선행 위주였습니다. 오늘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달려갈 것입니다. 저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

이 선생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로 오해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이처럼 그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자기의 근본 신앙이 그리스도 중심임을 분명히 천명하므로 제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미연에 예방하려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사람들이 이 선생을 다른 기독교인들보다 존경해 온 점은 절대 순결 생활을 강조했다든지, 거지같이 청비하게 살았다든지, 살생을 안 했다든지, 약을 안 썼다든지 하는 것들이었으나 이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누운 채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부질없는 이현필 관(觀)을 뒤엎고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실제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다 주시겠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놀랐으나 이에 순종하여 굴비 하나를 사다가 끓였습니다. “수고했소! 그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시오!”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지켜오던 목숨과도 같은 채식의 정절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신인처럼 존경하던 이들은 이 선생의 사상이야 어떻든 밖으로 나타난 행실, 순결 생활, 금욕 생활, 청빈생활, 등을 보고 신성시하며 따랐는데, 지금 고기를 먹는다면 모든 이들이 큰 실망에 빠질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의 보혈(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인식하던 그의 위대한 신앙이 살아서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64년 52세 때 제자들과의 고별모임을 가졌습니다. 업혀나가면서도 말씀을 증거할 때는 “아! 기쁘다!”를 연발했습니다. 광주를 떠나 벽제 계명산 산장에서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잡았습니다. 계속 앓으면서도 기도에 파묻혀 지내던 3월 17일 새벽 모든 제자들이 고요히 둘러앉았습니다. 숨이 막혀가는데 가장 나이 어린 제자에게 나는 지금 곧 숨이 끊어집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순결한 삶을 살겠노라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몸부림이 피 흘리듯 묻어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기쁘다! 기쁘다!” 라고 했습니다. 임종 수일 전부터 천국의 기쁨이 그에게 밀려와 어쩔 줄 모르더니 그 절정에 다다른 것입니다. 주위 제자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며 무릎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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