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방애인/ 조선의 성자ㅣ거리의 성자ㅣ신앙의 위인전
방해인은 1909년 9월 26일 황해도 황주읍 벽성정 52번지 방중일씨의 장녀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조부 방흥복 씨 때로부터 자선 사업의 이름이 높은 가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집안에 난 애인양은 어릴 때로부터 그 조모 정신복 씨와 그 어머니 김중선 씨의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비의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품은 곧 그의 신학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같은 거룩한 환경 속에서 깊이깊이 젖어 왔습니다. 그녀는 7살 되던 해 4월 1일부터 황주읍 양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설립자가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적 교육을 시켰습니다. 애인 양은 입학한 때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병으로 인한 단 한 번의 결석이 있었을 뿐이오, 한 번의 조태나 지각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13살 되던 해 전교의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어린 애인 양은 드디어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따뜻한 품을 떠나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애인 양은 언제든지 최우등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품행이 아름다워 여러 선생님들에게 끝없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교장은 어린 애인 양을 등에 업고 아래 위층으로 승강기 노릇을 하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불행히 3학년 되던 해 학교 내부의 불상사로 인하여 학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애인도 부득이 개성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6년 3월 23일에 최우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이화동산을 찾아 문과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님의 승낙을 얻지 못하여 학업의 소망을 누르고 후일의 기회를 기다리며 전주기전여학교회 교원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방해인은 1926년 4월 1일 전주 기전여학교에 부임하였습니다. 사회생활에 첫 걸음을 내딛던 때라 보통 평범한 한낮 신입생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정한 품행과 경건한 믿음의 생활은 누구나 다 칭찬하였습니다. 더욱이 교회에 대한 의무를 실행하는 것과 교회를 존경하며 순종하는 태도가 참으로 진실하였습니다. 얼마 후 학교를 떠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습니다. 애인은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이 없는데 1천여 명 교우들이 눈물로 보내니 두렵기 짝이 없다면서 하나님의 허락이 계시면 다시 오리라 약속하였습니다. 애인 양은 전주를 떠나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2년간 고심 분투함으로 모교의 교훈은 날로 왕성하였습니다.
전주 기전여학교는 그 후 교원 갈아들이기를 실로 빈번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방해인 양을 다시 전주로 보내시었습니다. 1931년 9월 1일 기전 여학교는 다시 방선생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온 방애인은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향수니 크림이니 하는 화장품은 자취도 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값진 옷감조차 그에게선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주신 얼굴 그대로의 사람이요, 검박한 단벌 옷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기도의 사람이요, 성경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전도하는 사람이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병든 자의 친구요. 슬픈 자의 위로이었습니다. 그는 거지의 친구요. 싸우는 자의 화평이었습니다. 그는 산중의 성자가 아니오, 거리의 성자이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절대 복종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습니다.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라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이었습니다. 애인 양의 이 거룩한 생활의 동기를 묻는 자가 있으면 애인 양은 고요히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전주를 떠날 때 결심한 바를 말하던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기는 언제나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맛보려고 심히 갈급하였더니 어느 부흥의 석상 마지막 새벽에 부흥사의 기도를 받고부터 자기도 모르게 이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방애인의 손으로 기록한 일기의 일부분입니다. “1930년 1월 10일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듣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 하였고 계속하여 11일 일기에 나는 어디로서인지 손뼉 치는 소리에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갔다. “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기는 곧 부흥의 때의 은혜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음성이 임함을 듣고 애인은 ‘새 나라를 향하여 가는 날을 금하지 말라’는 태도로 굳센 주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애인의 커다란 괴로움은 친족의 구원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황주의 초대 교인으로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황주는 예로부터 남자면 대게 첩을 두는 음란한 고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제2의 부인을 두게 되었으니 이것이 타락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타락의 길을 밟은 아버지는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니 다소간 가졌던 재산도 어느덧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파산에 어려움에 빠질수록 그는 구원의 길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애인 양은 그러나 가산의 탕진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영혼의 타락을 슬퍼할 뿐이었습니다. 혹 어머님이 가사의 탕진을 걱정하시면 애인은 고요히 어머니의 손에 만지며 “어머니! 아버지는 이보다 더 큰 고통을 받으셔야 회개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더라도 그로 인하여 회개만 하신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면서 어머님을 위로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하여 눈물과 괴로움으로 고심하고 애를 태우는 애인 양을 본 교회 목사 박경모 씨는 애인 양이 아버지의 회개를 위하여 애통함은 참으로 볼 수가 없었다고 하며, 진리로 위로도 하여 보고, 매일 정오에 종소리가 나면 그의 아버지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기로까지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방애인은 이 세상을 떠나던 시간까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하여 차마 눈을 감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기를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1932년 1월 5일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40일을 금식 기도하셨다. 나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또 내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나는 이제부터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기도하리라. 아버지가 회개할 때까지 그러나 계속 할는지 나는 작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하겠다.” 이 결심을 한 후 방해인은 죽는 날까지 아침을 안 먹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남들이 몰랐으나 점점 온 학생들이 알게 되고 온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무들은 손을 잡고 권하나 ‘차차 먹지요.’ 하는 한마디의 대답뿐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님은 너무도 안타까워 “애야! 예수님께서도 40일을 금식하셨는데 너는 벌써 3년이나 되니 이제는 고집하지 말고 먹고 기도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반사의 대답도 없이 고요히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애인의 몸은 점점 든든하여 갔습니다. 애인의 얼굴은 전보다 더 피어올라 아름다워졌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신비한 광채가 남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에는 무슨 병이 있지나 아니한가? 심지어 혹은 그의 폐가 약한 것 같다고 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식할수록 기적적으로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 사교의 능란한 아버지는 남의 보증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김 아무개라는 친구가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할 적에 보증을 서준 일로 결국 2200원에 빚을 지게 되니 그 빚을 물게 되었습니다. 방애인은 여자 기독교 청년회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되고 아버지는 재판 사건으로 서울에 가게 됩니다. 그때 고모의 집에서 쓴 일기입니다. “1932년 7월 22일 나는 경성수양회에 갔었다. 아버님은 보증한 돈 2200원이나 물게 되어서 대단히 근심하시어 어쩔 줄을 모르시는 모양이다. 자식 된 나는 어찌하리오. 오직 구원자는 위에 계시다. 그리하여 나는 경성 고모님과 약속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라. 2200원을 220원으로 탕감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집에 사활이 걸린 이 크나 큰 문제를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되었으랴! 주님 외에는 누가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리오. 아 감사하나이다. 찬송하나이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시여.”
애인의 사촌형은 평양 믿지 않는 가정으로 출가되었습니다. 애인은 방학을 이용하여 전도하러 평양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그 형은 진남포에 볼일이 있어 가고 없었습니다. 애인은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일기에 “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왔는데 형님은 진남포로 가시고 계시지 아니함으로 나는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큰어머님과 같이 기도하는 주님의 묵시하심이 내게 임하여서 이 밤에 형님이 오실 것을 믿고 있었다. 과연 그날 밤 중에 형님은 오셨다. 오시는 길에 도적 같은 사람을 만나서 크게 욕을 보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무사히 왔다고 한다. 그 시간을 물은즉 내가 큰어머님과 힘써 기도하던 시간이다. 아! 우리 형님을 도우신 이는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 또 내가 기도하고 바라던 것도 형님으로부터 쾌히 승낙하시었다. 오!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달고 맛이 있는지 맛 본 자 외에는 알 수가 없도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섰습니다. 그 속에는 나이 많은 정신병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구경거리 같이 놀리며 떠들었습니다. 놀림을 받는 노파는 반항과 저주로 중얼거리면서 슬퍼하였습니다. 이를 본 애인양은 병자의 곁으로 고요히 가서 눈물을 머금고 병자의 손을 잡아 인도하였습니다. 둘러선 구경꾼들도 감격의 눈물에 젖었습니다. 애인양은 그를 학교 부근 강필남씨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이렇게 일기를 적었습니다. ‘불쌍한 할머니를 수남이 어머니 댁에 두고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식비를 담당하기로 하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정신병자를 데리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병자는 때마다 정신이 혼돈하여 광기가 발작되었습니다. 이 불쌍한 노인이 헛소리를 하면서 날뛰며 괴롭게 하니 수남이가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나는 너무도 가엾어 하나님께 깊은 눈물로 기도하였다. 과연 그의 정신은 좀 깨끗하게 되었다. 아이는 나의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 일기에 이렇게도 쓰여 있었습니다. 이 일기를 보면 양이 정신병자를 위하여 그의 가슴을 얼마나 태웠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능력으로 당장에 낫게 하셨지만 긴 세월을 두고 노심초사하는 양의 마음은 진실로 성자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다음 일기를 읽어보면 방애인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3월 23일 우리 학교에 졸업식 하는 날이다. 수일 전부터 졸업을 맞이하는 학생들은 기쁨으로 준비에 분주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갈 길이 막연하므로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저들은 기쁨 대신에 나는 기도에 고심하였다. 뜻밖에 전주의 고등여자성경학원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그곳으로 더러가게 되므로 감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김홍래는 배목사님에게 그 장례를 상의하였더니 대구로 가게 되었다 하시므로 주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쉬지 아니하시도다. 감사하다. 졸업생들의 갈 길은 이제 다 결정되었다. 그러나 졸업 당일이 웬일인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운무가 가득하던 그들의 앞길이 겨우 주선되니 또다시 기쁨의 졸업 날이 어두움에 쌓였도다. 나는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과연 뜻밖의 일기는 청명하여졌다. “어찌 주님께 감사하지 아니하리오.” 애인양은 어린 학생들을 이렇게 사랑하였고 그들의 장래를 걱정하였습니다.
양은 참으로 약한 자의 강함이오, 넘어진 자에 일으킴이요, 남의 짐을 지고 가는 자였습니다. 학생 중 김시은이란 아이는 금년 17세인 고등과 1학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조선인 교회의 목사로 시무한다. 그의 아버지의 편지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으므로 시은이는 밥을 먹지 않고 멀리 계신 아버지의 신변을 위하여 걱정하기를 마지아니한다. 여간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 마음이라 나는 시은의 눈물을 닦으면서 손을 잡고 고요한 방을 찾아 위로한 후에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그야말로 탕자가 아버지를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하였다. 어린 딸이 멀리 계신 아버지의 신변을 염려하는 창자 끊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두 사람은 다 기쁨을 느꼈습니다. 과연 몇 날이 못 되어 그의 아버지로부터 평안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또 일기에 이런 것도 적혔습니다. 김인겸은 19세인 고등과 2학년생이다. 그는 나를 찾아 자기의 생활을 말한다. 웬일인지 신앙이 점점 식어져 냉랭함을 깨닫게 되고 공연한 괴로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은밀한 방을 찾았다. 나는 그로 더불어 겸손히 기도하였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우리는 열정적으로 믿음을 구하였다. 그와 나는 마음의 더워짐을 느끼고 매 토요일 아침마다 같이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는 중에 그는 마음의 기쁨이 넘치고 양심에 거리끼는 바도 다 씻어짐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오오! 주는 나의 힘이라 하셨다.
방해인은 또한 10가지의 계행 조목을 세워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목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
내 가정 내 민족으로 하여금 천국 백성이 되게 할 것.
1.은밀히 기도하였습니까? 2.성경 한 장을 보았으며 전도하였습니까? 3.배우는데 열심하였습니까? 4남을 섬겼습니까? 5.윗사람에게 순종하였습니까? 6.친구를 먼저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까? 7. 맡은 직분에 충실하였습니까? 8.시간을 귀히 여기고 부지런하였습니까? 9.검박하게 생활합니까? 10. 말에 실수가 없습니까? 이러한 열 가지의 조목을 세우고 자기 스스로 실행하며 이것을 매일 체크하였습니다.
방양은 학교의 선생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학생들의 어머니며 길이고 위로자였습니다.
병이 날 때에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을 때에 은밀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도하여 주고, 꼭 벌을 당한 학생이 있을 때에는 고요한 곳에 데리고 가서 눈물로서 권면하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학생이 있으면 고요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옛날 위인들의 전기를 이야기하여 위로도 하며 용기를 주고 위하여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혹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쫓겨난 학생이 있으면 자기의 박봉 중에서 도와서 졸업시킨 아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졸업하고 갈 길이 막힌 이에게는 갈 길을 지도하여 주고, 웃는 이로 하여금 같이 울고, 웃는 이로 같이 웃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선행을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알지 못하는 은밀함 가운데 금식하며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방선생님 하면서 따르던 학생들은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살지언정 강선생의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표어였습니다.
1927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앞두고 전주 고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자기독교청년회는 전주 4곳 교회의 청년들을 망라하여 고아원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서문밖 유치원에 모여서 한 주간의 기도회를 열고 회원 일동은 열렬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회를 마치고 각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찾아서 자기들의 뜻을 말하였습니다. 세 사람씩 떼를 지어 8천호의 전주 시내를 가가호호 방문하고 10전 12전 1원 2원의 돈을 모으기에 분주하였습니다. 학교에서 하교 종소리가 나면 기부금 책보를 끼고 줄다름질 쳐서 시내로 향했습니다. 더욱 장애인의 허술한 차림새는 참으로 간절한 태도였습니다. 목석이라도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금을 하러 가서도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하더니 기부를 청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도부터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무기는 기도였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물러나고 기도하지 않고는 말하지 아니함이 그의 신조였습니다. 8천여 호를 심방하던 그는 기도로 성공하였습니다.
다음 해 12월 성탄 전에 고아원 수리는 끝났습니다. 고아원사 건축 보고도 끝나고 준공된 고아원은 일반인에게 공개 관람을 시켰습니다. 10달 동안이나 고심하던 고아원 집을 완성하고,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탄일을 맞이하는 애인 양은 1천여 명의 남녀를 앞에 두고 대담히 강단에 나타나 조리 있게 도도한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이날 밤 청중은 양의 일원일동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긴장 속에서 지났습니다.
성탄 축하식이 끝난 후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전주에 있었습니다. 그 방학 동안에 무식한 농촌 여자들을 모아서 야학을 시켰습니다. 며칠 후 밤 11시쯤이었습니다. 눈보라와 바람이 귀를 에이고 코를 비는 듯하던 춥던 밤이었습니다. 함께 고아원 사역을 하던 배은희 목사 가족이 자려고 하던데 사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방애인이 눈보라를 뒤집어 쓴 채 등에는 잠자는 고아를 업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길가에서 너무 추워서 떨기에 업고 왔습니다. 애인 양은 그 밤으로 머리를 깎아주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혀 고아원에 업어다 두고 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몇 번씩은 어린 고아는 업고, 큰 고아들은 앞에 세우고 목욕탕에 가서 씻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실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모양과 방불하였습니다.
방양은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 목사님에게 눈물 겨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 보세요. 옷이 하도 없어서 할머님이 입으시던 털로 안을 받친 저고리 한 개와 햇솜을 둔 바지 한 개를 하여 보냈더니 한 번도 입어보지 않고 다 남에게 주었어요.’ 애인이 죽은 후에 옷이라도 찾자 떨어져 입지 못할 것 몇 개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가 운영했던 주일학교 학생들 중에는 애인 양의 옷을 얻어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방애인은 길에서 혹은 남자와 남자끼리 혹은 여자와 여자끼리 또는 여자와 남자 아이와 아이가 서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차고 때리고 악담과 욕설로 싸울 때에는 애인 양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숙여 기도했습니다. 조용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따뜻한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그들의 상하고 터진 마음을 어루만져 웃음으로 악수를 시켰습니다. 양은 실로 불한당을 만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방양은 금주 운동을 위하여 자기의 성의를 다하였습니다. 길바닥에 술에 취하여 누워있는 사람을 보면 그는 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금주 포스터를 손에 들고 길 가는 사람에게 뜨거운 눈물로 외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금주회를 조직하여 친히 간부가 되어 전심으로 노력하였습니다.
방애인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 생명을 살리려고 하였습니다. 길을 가면 길 가는 사람에게 같이 일하면 일하는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밥을 먹으면 같이 먹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학부형을 방문하면 그 학부형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기차를 타면 같이 탄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걸인을 만나면 간곡한 태도로 곁으로 가까이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홍석호 선생과 같이 고아원 집을 사려고 집 주인을 찾아다니던 때였습니다. 집을 사겠다는 매매 계약이 끝나고 일어나려 한 때 박 양은 홍 선생에게 전도하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홍 선생은 감히 그들 앞에 입을 열어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 그대로 가자는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라는 눈짓을 또 하나 실로 용기가 없다는 태도로 주저하자 그녀는 대담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그 완고한 노인들도 처녀의 입으로 쏟아지는 복음의 권위 앞에 충분한 감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매 토요일 오후면 전도지를 들고 노방에서 전도하였습니다.
방애인이 전주기전학교에 취직된 얼마 뒤의 일입니다. 그때 서문밖 교회에는 보통 교인보다 선교사 경영인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남녀 교원과 학생들이 반수 이상이었습니다. 때마침 두 학교 교원 가운데 몇 분과 청년 일부 사이에 전부터 언짢은 감정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감정은 격화하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충돌은 결국 교회 목사들 선교사에게로 전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원들은 선교사를 끼고 단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양은 그 통에 들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협조로 힘을 다하였습니다. 학교도 교회가 있은 후의 것이요, 선교사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있으므로 선교사와 동료 교원들에게 미움을 받아 교사의 직을 그만두더라도 교회의 존엄을 어디까지든지 잊지 아니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때의 방양이 있었기에 폭동화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운영하는 중산리 주일 학교가 있었습니다. 양은 그곳 책임자로서 풍우를 불구하고 상당히 먼 거리건만 3년을 하루같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성의를 다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곳에서 많은 신도가 일어났습니다. 주일 학교 시간을 마치면 여자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인도하느니 병자를 위로하느니 전도하느니 하여 언제든지 밥 한 번을 제 끼니에 먹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동리의 가난한 여자치고는 애인 양의 옷을 얻어 입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밖에 중산리 건너편에 전정리라는 동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도 학생들을 보내어 주일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그곳에 더 가서 발우마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도 학생들을 보내어 주일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태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반드시 서문밖 당회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시작하였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의 가정 방문이나 기전 학교 학생의 가정 방문이나 조금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주일학생의 학부형이 병난 사람이 있으면 곧 가서 기도하여 주고, 그들의 집에 죽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 위로하였습니다. 교회의 직분이면 어디까지나 겸손의 태도로 순복하였습니다. 결코 나는 이러한데 너희들은 어찌 그리 무력한고 하는 태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독신으로 살기 어려운 생리적 요구가 있습니다. 옛날 성자들도 이 욕구를 초월하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남녀 모두 독신 생활을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방양은 용모로나 마음으로나 어디로 보든지 미인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아리따운 여자로서 성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굳은 결심을 알아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를 통하여 혹은 그의 친구를 통하여 청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빗발같이 청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간구가 있든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든지 주저할 여지도 없이 웃음의 말, ‘시집을 가면 무엇을 하나요.’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한 번은 정말 어려운 처지를 당할 때 방해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방양의 부모님은 딸의 혼사를 포기하기 어려웠습니다. 황주의 어떤 유산가의 집에서 방 선생의 친구인 지선생을 통하여 직접 간접으로 청혼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님은 간절히 권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방애인은 이렇게 답장하였습니다. ‘어머님의 뜻을 잘 알지만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앞길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염려하지 말아주세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세요. 저의 일은 집에서 너무 서두르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가정에는 조금도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공부나 더 하려고 합니다. 잠깐 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일 외에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저를 위하여 염려 마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깨달으실 줄 압니다. 저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또 그의 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933년 4월 3일 수 일 동안 나는 병으로 고생하였다. 병중에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두 가지이다. 독신으로 병이 나더라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외롭지 않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시지 아니하시더니 과연 좋은 무덤에 들어가셨다. 그런즉 병이 나든지 죽은 후 일이든지 염려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방해인은 평생 독신을 지키며 그리스도께 자신의 순결한 몸을 바쳤습니다.
방해인은 1933년 6월 그믐달 방학식이 끝나고 고향인 황주로 향하였습니다. 오래간만에 오는 딸을 맞는 집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셨습니다. 딸의 아침 금식을 안타깝게 여겨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셨는데 너는 벌써 이것이 몇 회냐. 밥을 좀 먹어보아라.’고 권하였으나 양은 웃음으로써 차차 먹는다는 뜻을 표현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조모님은 늙으신 어른이라 날마다 기회가 되면 성경을 가르쳐주고, 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이웃 사람만 와도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 방학 동안에 양의 집은 마치 사경회나 하는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방양은 웬일인지 금번 방학에는 한 시간도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각처에 있는 친족에게 전도하러 가고 또는 돌아와서는 하기학교를 인도했습니다. 찬양대를 연습시키고 개인에게 풍금 교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양은 전심전력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하자 9월 1일 개학 때가 되던 전날부터 몸이 춥고 두통이 났습니다. 날로 오르는 열은 40도에 달하였습니다. 다시는 회복의 희망이 없다는 전보를 받고 오는 양의 아버지가 오기도 전에 숨이 지려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 볼 적에 그 어머니의 가슴은 아프고 미어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엎어질 듯이 정신을 수습치 못하고 뛰어 들어오는 아버지는 “아! 애인아 이게 웬일이냐? 애인아 내가 왔다.” 하면서 딸의 손을 잡자 방양은 눈을 떠서 “아아” 두어 소리만 남기고 고요히 티끌 마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세상을 이기었나이다.” 하는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갔습니다.
방 선생이 운명하였다는 소문은 전보보다 빨리 온 전주에 퍼졌습니다. 고 방해인 양의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를 향하여 가는 소복 입은 수십 명의 여자들은 눈물 앞을 가리어 차마 가지를 못하였습니다. 철모르는 고아들은 땅을 구르며 울었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목을 놓고 우는 소리는 공동묘지에서 전주 부중을 움직였습니다. 방해인의 일생은 예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눈과 같이 흰 성자의 생활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명이 죽어가는 이 시대 가운데 주님을 따라간 거룩한 사람 방애인과 같은 이들이 많이 나와 이 땅에 참다운 생명의 새싹이 트며 몇 백 배의 열매를 맺길 소망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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