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삶

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 성인들의 삶

성인들의 삶

록펠러 생애

  • 이은아 목사
  • 2024-09-14 08:52:00
  • hit486
  • 221.160.156.187

록펠러 생애

[유투브- 크리스찬 튜브] https://youtu.be/vIHZdmiidcE?si=PaHaEiPQyKZrOptD

록펠로 어머니 10가지 교훈, 11조의 비밀, 기부왕 109조까지 드렸던 록펠러를 소개합니다.

록펠러 어머니의 기도와 십계명, 아름다운 습관, 11조 평생 실천, 때로는 109조까지 드렸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 늘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듯, 신앙인 록펠러를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 엘리자였죠. 자녀들의 인격 교육을 위해서라면 눈물을 몸고서라도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는데요. 어머니는 2층 침실에서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매일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록펠로는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며 착실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유명한 10가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두 번째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세 번째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라. 네 번째 누구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다섯 번째 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라. 여섯 번째 아침에는 항상 그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라. 일곱번째 잠들기 전에도 항상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드려라. 여덟 번째 남을 도울 수 있는 만큼 힘껏 도와라. 아홉번째 주일 예배는 꼭 본 교회에 가서 드려라. 열번째 아침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특히 평생 록펠러가 십일조를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적은 돈일지라도 수입이 생길 때마다 한쪽 주머니에 십일조를 따로 떼어 놓으라고 늘 가르쳤던 어머니 덕분이었죠. 록펠러는 후일 제가 6살 때 어머니는 혼자 저를 교회에 보내시면서도 용돈으로 주신 20센트 중 10분의 12센트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어머니께서 받은 이러한 신앙의 유산들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일러시라는 시대를 잘 타고나기도 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받은 이러한 신앙의 유산들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타고난 성실과 정직성으로 말단 사원에서 세계 최대의 기업가로 한 단계씩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는 처음 회계장부 일을 맡았을 때 자신의 생활 태도와 재정 상태도 함께 기록했으며, 수입과 지출은 물론 사업 자금과 자산, 사업 내역까지 꼼꼼히 기록했죠. 늘 어느 싸구려 옷가게에서 옷을 사 입었지만 살 수 없는 비싼 옷들보다 훨씬 더 질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절약정신을 전해주는자녀들을 평범하고 신앙적으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하죠. 자녀들은 용돈을 받으려면 청소를 하거나 파리를 잡는 등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록펠러의 자녀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였죠.

록펠러와 자녀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고,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했으며, 자녀들은 훌륭하게 자라 록펠러의 자선사업을 이어받았습니다. 록펠러는 시카고 대학을 세워 많은 학생들을 길러냈고, 의학연구소를 세워 각종 전염병과 폐렴, 소마비와 매독 등을 치료할 백신을 개발해 인류 번영에 공헌했죠. 급기야는 이 모두를 통합해 록펠러 재단을 세우고 전 세계의 가난한 이웃을 돕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뉴욕의 명소인 록펠러 센터1930년대 대공황을 맞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시작된 건축물이었습니다. 록펠러는 이미 100년 전 최근에야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따뜻한 시장, 경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사회공헌이 일각의 비난처럼 시장 독점으로 인한 비난 회피용이나 상속세 무마용이였는지는 그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이후 100년에 걸쳐 수많은 기업가나 부유한 자들이 록펠러처럼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거나 뜻있게 사용하는 일을 명예롭거나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됐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재산 때문에 11조 액수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는 이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계산을 위해 40명을 일꾼으로 동원하기까지 할 정도였죠.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지만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린 것입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죠.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석유였습니다. 자살 직전에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거부가 된 록펠러의 성공 십계명을 보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습니다.

자선 사업과 악덕 기업 최고의 부자 록펠러의 두 얼굴./ 얼마 전 통계에서 역사상 전 세계 최고의 부자에 선정돼 또다시 화제를 모은 록펠러는 크리스천들과 일반인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평생 십일조를 드리면서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던 신앙인과 노동자를 착취하고 석유를 독점해 부를 이룬 악덕 기업이니 그것인데요.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가 다른 기독교 위인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의 약점을 가려놓은 채 포장만을 일삼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책은 록펠러에게도 우리 모두가 심지어는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마저 그러했듯 분명 약함과 허물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약점부터 살펴보면 사업에 있어 그는 늘 독점을 추구했죠. 때문에 후세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죠. 하지만 당시엔 독점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기 때문에 그는 이를 부도덕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업체들의 난립 때문에 가뜩이나 석유 가격에 널뛰기가 너무나 극심한 상황에서 제살깎기 경쟁을 하며 혼란을 지속하기보다 업체 간 협력과 인수합병으로 시장을 정리하는 편이 낫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지요사실 이러한 생소하고 잔인한 그의 사업 방식 때문에 독점이라는 개념의 제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소위 러들러 학살 사건도 그가 악덕 기업과 이미지를 갖게 된 대표적인 일이며, 석유제국 스탠더드 오일은 노조에 대해 강력한 대처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에 반발한 지역 노동자들이 광산 노동자 연합을 조직하고 동반 파업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스탠더드 오일이 사들였던 콜로라도 연료 철강은 연방 정부와 함께 맞서다 서로 총격전이 발생해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이때 록펠러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록펠러 2세가 회사를 맡고 있었지만 비난의 화살은 스탠더드 오일을 상징하는 록펠러에게 향했던 것입니다.

 

[유투브- 이지다큐] https://youtu.be/b8Jwd8XDrYA?si=3vVW45NZh4OojDVP

1839년 미국 뉴욕시 리치퍼드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납니다.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 훗날 석유왕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죠.

록펠러의 유년 시절 환경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윌리엄 록펠러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를 하는 사기꾼이었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았고, 아내를 두고 가정부와 바람을 피워서 사생아를 2명이나 뒀을 정도입니다. 훗날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을 버리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와 재혼까지 했죠. 아픈 과거를 기억하며 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말이죠.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미국 역사에 남는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앞서 말했던 그의 아버지는 한 가정의 남편, 아버지로서는 탈락이었지만 록펠러의 교육에는 나름 신경을 썼습니다. 그의 교육 방식은 굉장히 독특했는데요.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를 주는 식으로 용돈 벌이를 하게 시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죠. 심지어 성인이 된 록펠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낼 정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알게 되었죠. 또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칠면조나 사탕을 팔아 이윤을 남기면서 사업 능력 또한 키워나갔습니다. 심지어 19세 때에는 남북전쟁 중이던 북군에게 소금과 돼지고기를 팔아 꽤 큰 돈을 벌기도 했죠.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조그마한 곡물 위탁 판매 회사에 격리 사원으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하며 곡물 중개 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자신에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직접 도전하기로 합니다. 1859년에 모아둔 자금 1천 달러와 아버지한테서 빌린 1천 달러를 합해 친구와 같이 공물 중개회사를 창업하게 되죠. 이때만 해도 록펠러는 석유 사업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859년 펜실베니아주 타이터스비르에서 처음으로 시추 석유가 나오면서 미국 내 석유 사업이 급속도로 확산되니 록펠로도 석유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되죠. 본래 석탄을 원료로 쓰던 정유 공장들이 석유로 원료를 전환하며 석유 산업이 큰 부흥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돈 좀 벌고 있다는 사업가들은 모두 유전 개발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죠. 하지만 록펠러는 석유의 가치는 유전 개발보다는 정위에 있다고 봤습니다. 아무리 좋은 석유라도 정제하지 않으면 끈적끈적한 구정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록펠로는 남들 다 하는 유전 개발에는 손대지 않고 정제 공장을 세워 정유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때 이미 경험 많은 기업가들을 끌어들여 사업비용을 최소화시켰죠. 록펠러의 미래를 보는 안목은 정확했고, 이들의 동업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또한 록펠러는 석유 사업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게 되죠. 바로 운송 사업입니다. 당시 석유는 너나없이 채굴되었기 때문에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았는데요. 철도 회사들은 석유 수송이 일정하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매주 수송하는 석유량이 다르다 보니 수송비용도 들쭉날쭉하여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이 문제를 다른 경쟁자들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곧바로 철도 회사들에 접근합니다. 운송료를 할인해 준다면 우마를 통한 석유 수송을 중단하고 철도 회사의 매일 유조차량 60대 분량의 운송을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하죠. 철도회사들은 반갑게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운송료 협상을 통해 록펠로는 다른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됩니다.

이제 석유와 관련된 사업들을 장악한 록펠로는 충분히 큰 부자가 되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죠. 록펠러는 철도 회사의 운송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 정유 공장들을 흡수 합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에너지 기업인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세우게 되죠. 당시 100만 달러, 오늘날 가치로 150억 원에 해당하는 자본으로 시작했기에 스탠더드 오일은 시작부터 막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 외에도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미국 최초로 중역 회의 제도를 실시한 회사로 유명하죠. 아무튼 스탠더드 오일은 거대한 자본을 이용하여 미국 내 정유업계를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철도 운임 협상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니 다른 경쟁자들은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죠.

인수합병 전쟁을 시작한 록펠러는 경쟁자들에게 두 가지 선택을 제안합니다. 경영권을 팔고 물러나든가 파산하든가 가장 큰 경쟁업체부터 시작해 차례로 집어삼키며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내 가장 큰 정유회사로 우뚝 서게 됩니다. 187212월부터 18723월까지 이뤄진 4개월간의 인수 합병으로 거대 기업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록펠로는 창업한 지 9년 만에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장악하게 되죠. 이어서 록펠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이 스탠다드 오일에 의해 공급되었죠.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시장도 장악하며 국제 독과점 기업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1882년 석유기업 엑슨이라는 회사를 설립하며 세계 시장을 거머쥐게 되죠. 이렇게 안 그래도 잘 나가는 록펠로에게 또 다른 호재가 생깁니다.

1903헨리포드가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라이트 형제가 휘발유 엔진의 프로펠러를 장착한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하면서 휘발유 시대를 열어버린 것이죠. 특히 포드 자동차에서 대량으로 자동차를 생산하며 휘발유 사용이 말도 안 되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석유 산업 자체를 뒤바꿔버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죠. 록펠로의 석유 사업은 이렇게 또 한 번 큰 부흥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스탠더드 오일은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지배하는 지주회사 로 개편됩니다.

석탄, 철강, 은행, 선박 등 사업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하죠. 석유 산업을 지배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다른 산업들도 독점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록펠러는 조선업, 운송업 등 수십 개의 회사를 거느리게 되죠. 하지만 이 과도한 독점 체제는 미국 정부가 반독점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독점법이란 특정 기업의 시장 독점을 규제하는 법률입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80여 개국에서 이 정책을 시행하고 있죠. 아무튼 반독점법의 본격적인 시행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시오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에너지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도 미국 대통령을 상대할 수는 없었죠.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어 34개의 회사로 분리됩니다.

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되죠.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원래 스탠더드 외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던 로펠러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죠. 그래도 반독점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낸 덕분에 석유 산업의 독점 체제는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록펠러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가기 시작하죠.

사실 그가 만든 독점 체제는 수많은 희생자로 나왔지만 일부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록펠러는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간에서 욕도 많이 먹은 사람이지만, 석유 산업을 수직 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 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정유업에 뛰어들어 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석유 산업을 초기에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죠. 게다가 스탠더드 오일이 꽤 합리적인 독점 체제를 유지한 덕분에 동류 가격은 서민들에게 적합한 가격으로 인하되었고, 품질 혁신 또한 이루어졌죠. 또한 석유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 기업들의 롤 모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국 경제사에 이름을 남긴 록펠러는 독점 체제가 무너진 이후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요? 록펠러는 50대 후반에 알로페시아라는 탈모증과 비슷한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자선 사업을 시작하게 되죠. 사실 록펠러는 50대부터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시한부 통보도 받았겠다. 이제 록펠로는 자선 사업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로 마음먹습니다.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고아원 도서관 등을 세우고 많은 학교들에 기부금을 전달했죠. 연장선상으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의학과 과학 등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연구를 지원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 유명한 시카고대학교와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죠. 현재 시카고 대학교는 8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록펠러 대학교는 2022년까지 26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죠. 이렇게 록펠러는 미국 경제뿐 아니라 교육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자선 사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록펠러는 활기를 되찾았고, 의사의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무려 40년이나 더 살게 되죠. 그러다 1937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장수한 인물로 볼 수 있죠.

이후 록펠러 기업의 재산은 그의 외아들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에게 상속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재력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제일 가한 명문가로 거듭나게 되죠. 록펠러 가문은 미국의 제41대 부통령인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라는 정치 거물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로펠러는 사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업 경쟁자를 박살냈던 냉혹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들로 인해 미국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되었죠. 이렇게 명암이 확실한 인물도 드물 것 같습니다.

 

[유투브- 공감시대]

록펠러 가문의 가보는 가계부라고 하더군요. 록펠러한테 기자들이 질문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일푼으로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뭡니까라고 얘기를 하니까 나는 시작부터 일하고 저축하며 나눠주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한테 용돈의 3분의 1은 기부를, 하고 3분의 1은 저축을 하고, 마지막으로 3분의 1은 자신의 소비에 사용하도록 매주 훈련을 시켰고요. 이것을 잘 지키는 자녀한테는 보상을 했고, 어기는 자녀한테는 어김없이 패널티를 가하는 교육을 지속했습니다.” 이게 아마 100년이 넘게 이어진 록펠러 가문의 부를 유지하는 비법인 것 같습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
댓글작성

열기 닫기

댓글작성
반응형 홈페이지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