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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한국 장로교의 창시자

  • 이은아 목사
  • 2024-10-18 2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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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
https://youtu.be/EXvnIWuReyI?si=RI-1MVkcTCvW-IZK

 

 

 

언더우드는 18597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 언더우드와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원더우드는 과학자이자 발명가였습니다. 그는 발명의 재능이 뛰어나서 여왕에게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항상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갔고, 아이들과 함께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놀아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외증조 할아버지는 영국 런던 선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영국 성서공회와 해외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4살 때 우연히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인도는 인구가 대단히 많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크면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6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낳은 뒤 후유증으로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도 어려워져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프랑스 한 지방의 가톨릭 기숙남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언더우드 형제는 가정에서의 습관대로 자기 전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본 주변 아이들은 놀리며 베개를 던지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며칠 반복되자 결국 기숙사 안에 모든 소년들이 무릎을 꿇고 밤마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형제의 신앙이 빛을 바라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언더우드가 13살이 되던 1872년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미국 뉴더햄에 정착하여 제일 먼저 화란 개척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잉크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자식들에게는 일을 강요하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권했습니다. 18살에 뉴욕대학교에 입학한 언더우드11km를 걸어서 통학하였습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12시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식사는 부실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아낄 줄 모르고 열중하는 언더우드의 성품 덕분이었습니다. 언더우드가 대학생이 되면서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과 발명에 집중하느라 과로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고통을 주님을 바라보며 용감하게 견뎌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자녀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를 들으며 1881년 존 언더우드는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 노예 해방의 주역 윌버포스 등과 친구로 지내며 주님을 신실히 섬기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뉴욕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외모는 약 170cm의 키에 단정하고 세련된 외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매일 19시간의 학업 및 일을 하며 5시간을 자면서도 전도하기에 늘 열심을 내었습니다. 전도의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언더우드를 보고 교수님들이 오히려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교회 부흥의 때에 주일 하루 동안 78번의 예배에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는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새기며 매일매일 전도에 힘썼습니다. 언더우드는 종파와 계급, 인종적인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구세군은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는데, 언더우드는 그들과 길거리에서 만나면 언제나 함께 어울려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기도와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이런 성격은 나중에 선교지에서 더욱 빛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4살배기 소년 시절에 꾸었던 선교사의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런데 선교를 위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졌습니다. 주머니 사정은 늘 변변치 않았고 다음 식사를 해결할 돈이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궁핍하게 살아가던 대학 시절 어느 월요일이었습니다. 난로에 석탄이 떨어져서 불씨가 꺼져 꽁꽁 언 손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전날 저녁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헌금에서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교수님 한 분이 안으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돈을 쥐어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훈련하여 나갔습니다.

 

언더우드가 의대 1학년이 되어 인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학생 때 선교 자원자들의 모임에서 120~300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의 마음에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미국과 처음 통상조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기에 한국에 갈 사람을 열심히 찾았지만 한국의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또한 몇몇 선교 지도자들은 한국에 들어가기 이르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는 엘트먼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마음에 찔림을 느꼈습니다. 그때 왜 내가 가지 않느냐?”라는 음성이 언더우드의 가슴에서 울려왔습니다.
언더우드는 선교부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회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 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언더우드에게 뉴욕에 있는 한 교회에 와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는 갈등 끝에 목회 청빙에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우체통에 넣으려는데 바로 그 순간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 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는 편지를 도로 집어넣고 장로교 선교부에 다시 신청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선교 본부에 갔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교부가 원래 파송하려 했던 사람이 조선에 갈 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가 파송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편지가 막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새로 임명된 선교부 총무 엘린 누드는 조선 선교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 어떤 성도는 조선 선교에 써달라고 1250달러의 헌금을 보냈습니다. 이로써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임명한 최초의 조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18841216일 그의 선교지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언더우드의 짐은 여행용 가방 하나와 타작이 한 대 그리고 대형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4월에 혼자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선교사들에게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위생 상태는 열악했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았는데 지하실도 없었고, 창문에는 창오지를 발랐을 뿐이었습니다. 모기와 파리떼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온갖 질병이 여러 외국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특히나 습기가 많은 조선 여름의 더위는 건강한 사람도 활력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기에 그의 선교 보고서를 본 사람들은 조선을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에 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였으며 불평을 사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온 지 3일 만에 알렌 선교사가 설립한 광해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한국어를 공부하여 1년 만에 전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졌습니다. 1886년에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작은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고아 하나가 언더우드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 나중에 새문안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는데 번개비라고 불렸던 김규식입니다. 번개비는 아버지는 귀양을 가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으나 그의 친척들도 그를 돌보려 하지 않아 고아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도 4살 어린아이까지는 돌볼 여건이 되지 않아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얼마 후 아이가 아픈데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약을 들고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언더우드는 과로와 몸살로 몹시 피곤하고 아픈 상태였으나 아이의 소식을 듣고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착하여 본 어린 규식은 너무 굶주려서 깡마른 몸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아이를 데려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어린 규식을 양자로 입양하며 존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사랑과 기도로 회복된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며, 후에 기독교 지도자가 되어 민족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해방이 된 후 귀국하여 우리나라 입법위원 의장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어가 제법 능숙해져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소책자도 출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쯤 아펜젤러와 공동 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처음 조선에 도착했을 때부터 성경 번역을 그의 사역에 우선순위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큰일을 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최초의 한국인 세례교인이 탄생한 것도 그의 성경 번역 사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한 양반이 유학 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를 반대한 구절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해 온 역사를 알기에 자신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척하면서 어느 날 알렌 박사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책을 훔쳐와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영접하고 이제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886711일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받은 노춘경이라는 인물입니다. 1887년 언더우드는 헐버트 선교사에게 망을 보아달라고 하고 세 사람에게 첫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외국인이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서울에서 약 800km 떨어진 을주까지 갔습니다. 이 여행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따뜻한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언더우드 또한 아이들을 보면 쓰다듬어주고, 주부와 하인들, 여관 주인과도 허물없이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으거나 언덕과 문가 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책을 팔았습니다. 또 다음 날이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한 번은 밤늦게 어느 마을 사랑방에 언더우드가 앉아 있는데 초라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농부가 만면의 웃음을 띠고 달려들어오면서 목사님이 좋아하실 것을 가져왔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그 커다란 소매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삶은 감자와 커다란 팬케이크를 꺼냈습니다.

어느 날 한 아주머니는 전도 여행 중인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성경은커녕 작은 책자나 찬송가도 얻지 못했지만 마음에 복음이 숨겨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는 죄를 버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일주일 7일 중 하루를 거룩히 지키고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 이제 아주머니는 집으로 돌아가 배운 말씀을 이웃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난폭하기로 유명한 싸움꾼이었는데, 그 또한 이 신앙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보급하는 권사가 이 마을에 와서 교리를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술집에서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임을 알고 술을 하수구에 다 버렸습니다. 찬송가와 교리 책을 얻게 된 이들은 더욱 열심히 전도하여 나중에는 700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었고,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사람 중에는 싸움꾼도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순회 전도 사역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선교 사역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선교 방식에 대해 선교부에서 많은 반대 의견이 나온 것입니다. 당시 어학 참고서를 출판하기 위해 일본에 잠시 있었던 언더우드는 고민 끝에 선교본부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얼마 후 선교 본부 회장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따뜻한 격려의 편지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다시 큰 힘을 얻고 주님께서 이 십자가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시기 전까지 다시는 내려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어스 오턴 선교사는 첫 아들 원한경을 출산하고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미국에서 잠시 휴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언더우드는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가서 처음 한 일은 선교본부에 가서 조선에 보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는 슬픈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언더우드는 개의치 않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신앙적인 열정이 뛰어난지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자기 사업을 하는 언더우드의 큰 형이 재정 후원을 약속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기회가 닿는 대로 교회나 신학교, 학생, 단체 등에 찾아가서 연설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미지의 세계라고 하는 조선은 놀라운 부흥을 앞둔 땅이며,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예비하신 땅입니다.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지금 선교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조선의 복음을 전하러 갑시다. 조선을 위해 기도와 후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언더우드의 열변은 후배 선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때 레이놀즈, 에비슨, 무어, 테이트 리 선교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더우드에게 많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형은 사업의 동업을 제한했으며, 큰 교회의 목회자로, 또 한 대학의 학장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아내 호턴의 건강도 많이 좋아져 다시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으로 들어와 찬송가를 펴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미 번역되어 있는 찬송가와 자신이 번역한 찬송가를 편집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이 용어 문제로 이 찬송가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개인적으로 찬양가를 출판하였습니다. 찬양집은 오선 악보로 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찬송가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나의 죄를 씻기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예수가 거느리시니이러한 찬양은 언더우드가 번역한 찬양입니다. 그리고 후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합동 찬송가를 만들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이 일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고, 합동 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편 당시 조선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언더우드는 이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1893년 말 언더우드는 미국에 있을 때 모은 기부금으로 휴양소를 건립하였습니다. 수목이 울창한 언덕에 지어진 훌륭한 휴양소는 버려지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의 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근처에는 작은 진료소를 세워서 호턴 여사가 약을 보급하고 여성 성경반을 운영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터져 외국인들은 모두 이동하지 말고 서울에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척 무더운 여름날 방 안에만 갇혀 지내던 많은 선교사들은 병에 걸렸습니다서울 사람들은 짐을 꾸려 피난 가기에 바빴습니다. 몇몇 선교사 가정의 자녀들은 이때 더위에 못 이겨 죽고 말았습니다. 언더우드의 가족들도 여름 내내 앓았습니다. 언더우드는 한국 열병에 좋은 키니네라는 약을 싼 값에 팔아 복음을 전하고자 미국에서 대량으로 주문하였습니다. 약병회는 미국에서 인쇄한 깨끗한 전도 문구로 포장하였습니다.

키니네는 육체의 어떤 병에는 효과가 있지만 이 약으로 영혼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약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 곧 선교사를 방문하거나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생명의 책을 읽으세요.’ 이렇게 키니네와 함께 복음은 널리 퍼졌습니다.

 

1895년 봄 언더우드가 개척한 새문안 교회는 이제 넓은 예배당이 필요할 정도로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한 달에 5천 원 이상 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낼 수 있을 만큼만 내고 후원금으로 건물을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기독교는 외국 종교인데 왜 외국인들의 경비로 짓지 않습니까?”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만약 외국 돈만을 사용하여 성전을 짓는다면 기독교는 계속해서 외국 종교가 될 것이고, 만약 한국인의 힘으로 짓는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외국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한데 어떻게 짓겠느냐고 묻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냐고 오히려 반문하였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성도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한 끝에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극심한 더위와 함께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더우드는 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켜 방역에 힘썼습니다. 마을의 조력자들에게는 응급조치와 소독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앞장서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콜레라가 전국에 퍼지자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라는 벽보를 붙여놓았습니다. 콜레라를 통해 복음도 함께 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번은 어느 날 아침 언더우드가 병원에 출근하는 것을 본 한 일꾼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이 아침부터 저렇게 급히 어딜 가는 저 외국인은 누구입니까?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것도 모르나? 우리 조선인들을 너무 사랑해서 밤낮으로 병자들을 돌보며 일하는 예수쟁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선교를 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조선의 신분의 벽은 정말 높아서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또 다른 선교 방법을 고민하던 중 기독교인이 된 지식인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기독청년회를 생각하였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YMCA 국제위원회에 요청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한국 YMCA가 설립되었습니다. 교회 안의 상류층 젊은이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젊은이들과 함께 YMCA는 활성화되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더우드는 YMCA의 이사가 되어 그의 평생의 뜻인 대학 설립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지은 종로 2가의 YMCA 회관에 대학반을 만들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기독대학은 나중에 연희전문학교로, 그리고 연희대학교를 거쳐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YMCA를 통해 조선의 많은 청년들이 기독교 인재들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상류층 선교에 멈추지 않고 왕실까지 그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언더우드 부부는 고종과 민비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콜레라가 터졌을 때 선교사들의 희생에 감동한 고종은 언더우드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릴리어스터는 왕비의 건강을 돌보아 주었고, 왕비는 때마다 선물을 보내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민비가 시해되어 고종이 큰 충격에 빠졌을 때 언더우드는 고종 곁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고종은 궁중에 있던 어떤 신화도 믿을 수 없었지만 언더우드의 집에서 만든 음식이라고 하면 안심하고 먹었습니다. 국왕의 생일이 있는 9, 언더우드는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행사가 기독교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밤새 책자를 인쇄하고 찬송가와 함께 서울 전역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찬송과 70장의 곡조에 하나님께 이 나라와 왕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강구하는 내용의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천 명이 참석한 이날의 행사는 찬송과 기도로 시작하여 주기도문으로 끝났습니다. 설교의 내용,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이 나라가 번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금하는 나라에서 공식적인 예배 행사를 통해 수천 명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계속해서 기독교 국가 한국을 소망하여 열심히 선교하였습니다. 12주 동안 1600km를 걸어 5번의 지방 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이 여행 동안 네 군데에서 훈련반 모임을 열었고, 548명이 세례와 학습을 받았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경 번역과 저술 작업도 계속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 언더우드를 영접했습니다. , 달걀, 꿀 등 많은 음식을 가져와서 오히려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언더우드 부부는 전도 여행을 다니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행상이는 주일마다 장사를 하지 않아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도 꿋꿋이 지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의 비석을 교회의 계단으로 사용하라고 내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가 먹은 한 할머니는 무척 세례를 받고 싶어 했지만 귀가 어두워 질문을 들을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한 질문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예수님께로요.” 오직 예수님만이 희망임을 고백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해 보였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2천여 명의 등록된 신자들이 있을 정도로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1900년 드디어 신약전서가 출판되어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지독한 감기에 걸려 혹독한 고생을 한 탓이었습니다. 의사는 스위스 같은 곳에 가서 휴양하고 오라며 권면하였습니다. 1901년 언더우드는 두 번째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6세 청년의 몸으로 한국에 온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시키신 일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년에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성서공회에 들러 한국판 성서를 발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데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미국 선교부 총회가 주선한 강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도 하였습니다. 고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가진 안식년까지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 세문한 교회는 이제 벌써 비좁게 되었습니다교인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여인들을 위한 6개의 사경회가 매주 여러 곳에서 열렸고, 몇 명의 여인들은 여선교사들과 전도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1904년과 1905년 언더우드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특히 주일 오후면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정치적인 문제로 감옥에 갇힌 높은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외로움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은 옛 친구를 만나 복음을 듣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게일 벙커 선교사를 도와 언더우드는 함께 이 일을 해나갔습니다. 감옥에서 읽을 것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과 소책자와 찬송가를 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을 때, 뿌려진 씨앗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로 열매 맺었습니다. 이들 중 이승만이라는 젊은이는 감옥에서 받은 성경을 통해 회개하고 이 복음을 감옥의 동료들뿐 아니라 간수들에게까지 전해주었습니다. 이상재는 유명한 감옥 그룹 중 하나를 조직해 서울의 상류 계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성경을 연구하고 밤에는 모여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위대한 왕의 사자가 와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들을 무시했는지 일깨워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기회를 소홀히 하여 더 큰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회개하여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책이 바뀌어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내각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교회로 데려왔는데 후에 YMCA 총무가 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의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07, 이제 조선의 교인은 6만 명이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몸은 계속 약해져서 연설이나 설교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 번역과 교회들을 감독하는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스위스에 가서 차가운 공기 속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그를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언더우드는 유럽에서 쉼을 통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소책자를 준비하여 강연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수입이 많지 않았음에도 망설이며 100달러를 기부하더니 다음 날 와서 500달러를 내야만 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 또 와서는 자신에게 돈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천 달러를 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형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미국에 머물며 자신의 사업에 함께하자고 하였습니다언더우드 자신 또한 건강이 나빠지고 있고, 선교지에서 자신이 하려는 사업인 대학 설립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습니다그에게 선교는 십자가이기도 했지만 생명 이후 기쁨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지속되는 한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긴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 이전한 새문안교회의 건축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벽돌로 새롭게 건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날로 성장해 갔고, 언더우드의 할 일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언더우드가 자주 교회를 비우게 되자 소렛 사람 서경조 목사를 협동 목사로 두어 함께 동역하였습니다. 어느덧 언더우드의 나이는 50을 넘어가고 있었으나 그의 불타는 선교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때 회장으로 있던 대한선교사회에 새 건물을 지었고, 가을에는 전국 복음운동 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복음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무엇보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꾸던 꿈인 대학을 세우는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에게 근대적 고등 교육이 절실하며 이 민족이 가진 높은 문화 수준의 기독교 정신을 더한다면 세계 기독교와의 한국이 큰 몫을 감당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습니다. 대다수 선교사들은 이미 평양에 송시의 대학교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대학은 필요치 않다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계획은 수도 서울에 세계에서 뒤처지지 않는 종합대학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주변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선교사들과 지인들의 힘을 얻어 서울의 대학을 세우는 일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기독청년회관에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의 대학을 설치하여 출발점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일제 총독부가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없다며 법령을 반대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이때 신학과를 개설하여 자연스럽게 신앙 교육과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전히 경신학교 대학부로는 학교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아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세웠습니다.

 

1913년에는 정식으로 최초의 대표적인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230여 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가 첫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안수받은 지 5년 만에 한국교회는 7개 노회에 당회가 있는 조직, 교회가 134, 한국 목사 69명의 전체 교인 수는 127228명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13년 말에 들어서면서 언더우드는 서서히 몸이 허약해지며 병이 들기 시작했습니다그동안의 피로가 쌓여 쇠약해지고 탈진하였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에게 일을 그만두고 전문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다만 고개를 저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학 설립과 성경학교의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161월 환갑이 다 된 몸으로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총독부 법령 하에서 대학 강의를 하려면 일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에 9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또한 새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러나 동경에 있는 동안에도 점점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호터는 공부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자며 눈물로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견딜 만하다며 학기를 끝낼 때까지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마침내 3월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친구들은 언더우드의 건강 상태를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몸으로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대학 설립 신청서를 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마침내 기독교 학교를 보증하는 인가를 받아냈습니다. 언더우드는 하늘을 향해 감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연희전문학교가 정식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나 이제 대학교 부지에 건물을 세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교가 한국 서울에 정식으로 우뚝 서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언더우드의 건강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결국 그는 다시 한국에 온 지 31년 만에 미국 누이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한동안 건강이 회복되는가 싶더니만 무더위로 고생하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의사의 권고로 그를 애틀란타로 옮겼습니다. 그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갔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은 항상 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날 밤 말하기도 힘겨운 상태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으로 여행할 수 있어.” 라며 한국을 그리워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아내가 예수님이 곁에 계신 것 같아요?”라고 묻자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9161012일 오후 330, 마침내 언더우드는 57년간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언더우드의 죽음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서신이 전 세계에서 도착했습니다. 특히 한국과 한국의 동역자들로부터 수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삶에 감동받아 한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들도 이어져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불신자들조차도 그의 한국 사랑을 떠올리며 눈물 지으며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의 후배 선교사들은 그가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그의 훌륭한 인격을 증언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평생 수많은 선교 헌금을 받았지만 이를 성경을 번역하고 배급하는 일과 한국의 수많은 교회와 청년들의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헌신하게 된 것도 그의 강연과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하던 날부터 31년 후 한국을 완전히 떠나던 날까지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 4대에 걸친 후손들도 한국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 언더우드. 그의 삶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위대한 선교사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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