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조선의 빛이 된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
https://youtu.be/MPbYhkvnYjM?si=C0XMaRSX2XNHqsCZ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아버지 기데온 아펜젤러와 어머니 마리아 게어하드의 삼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은 독일계 루터 교회에 속해 있었으며, 스위스에서 살다가 1735년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주로 농사일에 종사했습니다. 어머니는 메노나이트 집안 출신의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일이면 세 아들을 불러 모아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읽어주며 성경 공부를 하곤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어학에 대한 소질이 있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독일어에 능숙했습니다. 또한 총명하고 열성적인 아이였던 아펜젤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통해 신앙적인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아펜젤러는 14세가 되어 세례를 받았으며 평범하게 소년 시절을 지냈으며 모든 일에 열심이었고 정열적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열심히 도왔고, 오락과 운동, 모든 것에 열심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늘과 땅, 새와 동물 등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2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필라델피아 서쪽에 있는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앤드 마샤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 당시 독립선언서가 서명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 독립된 미합중국의 수도이기도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생활 중에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여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에도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제2 감리교회에서의 기도모임과 조모임의 매력을 느껴 개혁교회에서 감리교 신도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내 양을 먹이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영혼의 목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아펜젤러는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중에는 크룩스 박사의 비서로 일하며 토요일에는 심방을 하고 주일에는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3학년 어느 주일에 선교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신이 가진 2달러 50센트를 헌금하며 자신의 돈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고 1881년 2월 26일 주일에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봉사하는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펜젤러의 선교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습니다. 그의 친구 와즈워드는 한국, 아펜젤러는 일본 선교사를 지망했습니다. 그러나 친구 와즈워드는 한국행을 포기하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와즈워드 대신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은 호랑이가 많고, 말라리아가 득실거리며, 무서운 식인종까지 살고 있는 나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는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펜젤러가 한국의 선교사로 가겠다고 말하자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선 분은 어머니였습니다. 비록 신앙은 좋으신 분이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꿈에 자기 아들이 시퍼런 태평양 바다에서 빠져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한국으로 가는 것을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신학교를 다 마치기도 전에 감리교회 외국 선교부의 조선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반려자가 될 엘라 닷지에게도 자신의 소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헌신한다는 생각에 기쁘게 승낙하였습니다.
둘은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의 제1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때 그는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때였습니다. 아펜젤러가 부인 닫지와 미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가려고 기차역에 나갈 때 드류 신학교 학생 전체가 나와서 찬송가를 부르며 손을 흔들면서 환송해 주었습니다. 1885년 2월 2일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에게서 목사 안수를 받은 아펜젤러는 이제 막 나온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조선으로 향하는 이라빅호 배를 탔습니다. 그때 스크랜톤과 그의 어머니도 함께 동승하였습니다.
아펜젤러의 일행은 일본에 들려 동경에서 조선 선교회를 발족하여 아펜젤러는 현지 부책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스크랜톤 부부와 그의 어머니는 요코하마에 머물면서 언어 공부를 계속했고, 아펜젤러 부부는 조선을 향해 먼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을 향한 배에는 아펜젤러 부부뿐 아니라 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도 동승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지금의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펜젤러 부부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미국 공사가 부인을 데리고 입성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잠시 일본에 돌아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 부부는 그때 미국 선교회 본부에 이러한 선교 편지를 썼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쇠사슬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여 주소서.”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의 그 모습은 지독한 궁핍과 가난으로 점철된 모습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미신이 득실거렸고, 학교도 병원도 없었고, 이동 수단은 말이었습니다. 조선의 숙박소는 밤새도록 벌레들이 몸 위를 기어다녔으며, 밤새도록 개와 닭, 돼지들이 소란을 피웠습니다.
아펜젤러는 1887년 4월 13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전략을 세우기 위해 평양으로 첫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자연 경관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조선은 죽은 조상들의 흙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존중받고 있었습니다. 촌락에서 사람들은 외국인을 보면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외국인 흡혈귀들이 그들을 잡아먹는다는 괴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특히 여성들의 참상에 탄식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여성들은 한 남성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이지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거나 아버지가 빚을 진 여성들 중에는 기생으로 팔려간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미국 선교부에서 학교 건축을 위해 4천 달러와 격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아침 6시에 일어나 한국어 공부를 하고 7시에서 8시 사이에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다음에 가족 예배를 드리고 운동을 하였습니다. 9시부터 12시까지는 한국어를 쓰고 말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집 밖에서 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독서와 기록에 매진하였습니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온 아펜젤러는 조선어의 복잡하고 정교한 경칭을 배우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한국어와 문자를 익히는 일에 꾸준한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민족의 언어로 전달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고, 아내와 자녀 다음으로 서재를 사랑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절기를 중요시하였으며, 애국자여서 미국의 중요한 역사적 날에도 특별한 감사와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는 절기마다 알맞은 성경 구절과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에 초석을 놓는데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25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주여!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서 오직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보내신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전파하기를 원합니다.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악마는 자신이 세워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어로 설교하는 것이 가능해진 아펜젤러는 학교를 세우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조선에 와서 보고 깜짝 놀란 것은 수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육 기관은 그저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 정도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시급히 자기의 좁은 방에 벽을 헐고 두 방을 합쳐서 교실을 만들었습니다. 장차 의사가 되려고 영어를 배우러 온 두 학생 이겸라와 고영필이라는 학생을 앞에 앉히고 1885년 8월 3일 첫 수업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는 ‘배제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 학교 간판을 써주었습니다. 이로써 배제학당은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배제학당의 교훈은 마태복음 20장 26절로 28절,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한문학자 조원규 씨가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바로 배제 악당의 교훈이었습니다. 배제학당 초기에는 외국인을 경계하는 부모들이 선뜻 자식들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시골에 잠깐 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고 하거나 5~6월 삼복 중 너무 더워서 잠깐 쉬겠다고 하며 영영 오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을 열심히 힘껏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은 대개 나이가 25세 내지 30세 이상의 학생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결혼을 한 사람들로 가정에서는 아들 딸 두세 명씩은 있었으며, 또 벼슬을 하던 사람들이 외국의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사상,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을 받아들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영어를 배우려고 모여 들었기 때문에 이미 한문 지식을 풍부히 가진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의 복장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수염이 검은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a b, c 하고 새로운 학문을 남보다 먼저 배우고자 열심히 하다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모두 밖으로 나와서 긴 담뱃대에다 담배를 피워 물고 피웠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 박사는 처음에는 술과 담배를 금하게 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맡겨서 공부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만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아펜젤러가 1892년에 말한 것을 보면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에 일꾼을 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뜻은 억눌림 받던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다시 자유주의 사상으로 바꿔주고, 학생 개개인의 성품을 높여주며 억압하지 않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밑에서도 배제 학생들이 활기를 펴고 기운차고 꿋꿋하게 대항해 온 것은 그 교육의 설립자 아펜젤러의 교육 사상이 그대로 전수되어 자유주의 교육을 받아온 까닭이었습니다.
학교를 세운 이듬해인 1886년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1886년 한국선교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감리교 교리 문답서를 번역 출판하여 이것을 기회 있는 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전도하는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젊은 학생들과 접촉하는 기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악을 가르쳐주기도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아펜젤러는 하루속히 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는 것만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고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아펜젤러 박사가 서울에 온 그 이듬해에 서소문동 49번지에서 맏따님을 낳았으니 그 이름이 알 아펜젤러였고, 한국에 있어서 최초의 백인 아기였습니다. 그는 오늘의 이화여자 전문학교를 설립한 초대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 얼마 후에 서울 정동 23번지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은 헨리디 아펜젤러였고, 그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배제 악당의 제5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또 딸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메리 아펜젤러였으며, 이 3남매는 한국 아이들과 공부하고 놀면서 다 한국말을 썼기에 꼭 한국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펜젤러 박사는 사랑과 덕으로써 사람을 다루었습니다. 교장으로 있을 당시 오늘날 비서라고 할 수 있는 김 씨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김 씨가 담 위에 얹은 기왓장 한두 개가 없어져 도둑을 맞았다고 생각하던 중 하루는 훔쳐간 자를 알아가지고 와서 아펜젤러에게 그 훔쳐간 자를 알았으니 그 자를 잡아다 처벌하도록 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아펜젤러는 김 씨를 보고 하는 말이 그대 눈으로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김 씨는 자기가 본 거나 다름이 없는 믿을 만한 이가 보았다고 하며 그 자는 술을 좋아하며 술집으로만 찾아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 박사는 김 씨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는데, 그 후에 김 씨는 기화를 또 훔치는 것을 직접 잡아가지고 왔습니다. 이번에 아펜젤러 박사는 그 자를 보고 참으로 내가 훔쳐갔느냐고 물어보니 ‘그랬노라.’고 숨김없이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사는 그가 기화를 훔쳐다 판 금액을 물어 그만한 돈을 오히려 더 주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솔직하게 말을 했으니 용서한다 하고 돌려보내었습니다. 그 후에 그 기화를 훔쳤던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교회에 들어가 훌륭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아펜젤러는 너그러우며 사랑과 덕성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1886년 성공적인 첫 해를 보내니 아펜젤러를 비롯한 동료 선교사들은 자연히 자신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887년에는 좀 더 대담한 사업을 계획하면서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교회 사업 즉 전도 사업에 대해서도 대담하게 나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때는 아직도 종교자유령이 내리지 않았고, 한국 사람으로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면 죽음을 면할 수가 없으리라는 1887년 이래 법령이 폐지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의료 사업이나 교육 사업에 전적인 찬동을 베풀어준 고종의 호의만을 믿고 이들은 용감하게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아펜젤러는 1887년에 들어서면서 이 해에는 두 가지 꿈을 이루어 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 꿈의 하나는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양옥으로 된 학교 건물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아펜젤러의 소망은 그 해에 곧 이루어졌습니다. 가로 76피트, 세로 52피트인 이 단층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르네상스식 건물이며, 이 속에는 예배 장소가 하나, 교실이 넷, 도서관이 있으며, 교장실, 사무실, 그리고 지하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하실은 학생들의 기술 훈련을 위하여 공장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한국에서는 가장 먼저 지은 벽돌로 된 서양식 양옥이었으며, 당시 서울 명물의 하나이며 중요한 역사적인 건물이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정치 문제를 들어서 학생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리를 따져서 해석할 때에는 힘 있게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며 학생들의 길거리에서의 연설이나 학교 내의 연설을 간접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많은 애국 투사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외국 영토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법률의 지배를 받지 않는 권리, 즉 그 나라의 재판권이나 경찰권에 복종하지 않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활동하는 정치범들을 피신도 시켜주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국내에서 정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그를 피신시켜 주었으며,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펜젤러의 큰 공헌 중 하나는 오지 여행과 우리나라 문화 연구입니다. 그의 여행은 언제나 탐험과 개척이었습니다. 그는 여행할 때마다 고생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풍속과 인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습니다. 1887년 4월 5일 평양을 방문하였고, 이듬해 봄에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북부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들은 얼마간의 의료품과 성서와 기타 종교 서적을 가지고 갔는데, 험하고 위험스러운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에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말을 타고 일주일 이상 걸려야 평양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고도 험한 그 길을 산 넘고 계곡도 건너갔습니다. 얼마쯤 가니 밤이 되었습니다. 낯선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머물러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문간방을 빌려주면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호롱불도 없는 캄캄한 방에 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그에게 빈대에 벼룩 모기가 덤벼들어 그는 그 밤을 밤새도록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꼬박 뜬 눈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어려움을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그는 그러한 험한 전도 여행을 수없이 많이 하였습니다.
한 번은 경상도 지방으로 선교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갈아입을 옷과 약간의 돈을 준비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경상남도 지역을 지나던 중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의외로 그 마을에는 십자가가 동네 끝 쪽에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12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그 아이에게 이 교회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그 아이는 예수님을 잘 믿고 열심히 공부하여 장차 목사님이 되고 싶다는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아펜젤러는 그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공부도 시켜주었으며, 자기 집에서 먹이며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후일 자라서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어린이들을 꿰어서 삶아 먹고 그 눈알을 뽑아 그들이 병원에서 약으로 쓰거나 또는 사진으로 찍는 데 사용한다는 소문이 돌아 서양인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미움은 날로 심해갔습니다. 서양인들에 대한 폭행도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집과 학교, 교회, 병원은 언제 한국 사람들에 의해 습격당하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이를 업고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때로는 어린이 유괴범의 혐의를 받고 대중의 공격을 받아 매를 맞거나 심할 때는 죽음까지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으로 서양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가지 못하고 계속 집에 갇혀 불안스럽게 하루하루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헛소문으로 일어났던 소동은 몇 개월이 지나서 잠잠해졌으며, 선교사들에 대한 의심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박사는 집 안에 갇혀 지내는 동안 그가 섬기는 하나님께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어려움과 고통을 하루속히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아펜젤러의 학당과 선교 사업은 활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박사의 학당 일이나 선교 사업은 정말 괴롭고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 활동으로 배제학당의 교육 사업과 우리나라의 교회는 날로 번창하여 왔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학교로 계속 몰려들었고, 감리교회 선교 지역도 점점 늘어 북으로는 신의주, 남으로는 부산, 서로는 인천, 강화, 동으로는 원산으로 뻗어나갔습니다.
물론 이런 활발한 선교 활동은 비단 아펜젤러 혼자만의 노력에 의하여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뜻을 함께한 많은 선교사님들의 피나는 노력과 협력의 덕이었으나, 모든 총책임을 맡은 아펜젤러의 헌신적인 노력과 맡은 바 일에 있는 힘을 다하는 그의 정열이 컸습니다. 당시에는 아직도 서울에 서대문 같은 성곽이 그대로 있어서 교회는 성내의 서쪽 구석에 있었던 만큼 낮에 모여서 예배드릴 때는 괜찮았으나 밤 예배는 여러 가지로 불편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선 1900년에야 비로소 서울에 전기가 들어왔기 때문에 또 저녁때만 되면 서대문을 비롯한 서울의 사대문을 굳게 닫히기 때문에 성 밖에 사는 교인들에게는 불편이 대단하였습니다. 이들이 저녁 예배에 참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 번은 열성 있는 교인들이 그의 부인들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저녁에 학당장이 인도하는 예배와 성경 공부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저녁에는 서대문이 닫히기 때문에 도저히 출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모험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즉 저녁에 서대문이 닫히기 전에 미리 부인을 성내로 들어가게 했다가 저녁 예배와 성경 공부를 다 마치면 몇 사람이 동원되어 그 부인을 광주리에 담아 밧줄로 성벽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내려보내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얼마나 모이기에 힘썼던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한 성격을 타고난 아펜젤러는 선교 사업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 봉사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 사업을 시찰하러 온 어느 미국 감리교회의 감독은 아펜젤러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세 사람의 일을 하고 있다라고 감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펜젤로의 이러한 많은 노동은 자연이 그의 육체에 영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지 7년 정도 되었을 때 그의 몸무게는 퍽 줄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90kg 정도의 체중이었는데 이제는 27kg이나 줄어서 63kg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이렇게 몸이 쇠약한 중에도 또한 큰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녀 교인 수는 2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드릴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5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큰 예배당을 지을 거창한 작업을 계획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교인들에게도 예배당 건축을 위해 힘쓸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재건축은 시작되었습니다. 손에 현금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이귀동이라는 이화학당 학생의 갸륵한 정성이 전체 교인을 감동시켰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의 머리는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귀중한 머리를 잘라 팔아서 헌금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정성이 모여서 벽돌 예배당 건축 계획은 시작되었고, 전체 교인들의 바람과 열성은 대단하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시작된 이 공사는 계속 믿음 안에서 진행되어 근 2년간이나 걸려서 마침내 교회는 완성되었습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완성하기까지 아펜젤러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온 교우들의 보람과 자랑 또한 이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빨간 벽돌로 된 이 나라 최초의 아름다운 서양식 예배당이 드디어 탄생한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서울 시내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박사의 생활은 철저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서 하나님께 먼저 기도드린 후 그날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의 성품은 대단히 과학적이어서 이치에 꼭 맞는 생활을 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생리학 시간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소 머리를 구해다 놓고 수업을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표본이 없었기에 수업시간에 직접 물건들을 사와서 보여주면서 일일이 설명하였습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중등 교육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배재학당에서는 그처럼 알찬 수업을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의 건강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먼저 철봉대를 세우고 체조 시간이면 철봉하는 법을 가르쳐 학생들의 건강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구기 운동을 좋아하는 스포츠맨이기도 하여서 당시 매트가 없어 새끼줄을 메고, 널판 조각 라켓을 가지고 전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가정에도 대단히 충실한 남편이며 인자한 아버지였습니다. 매일 저녁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아들과 딸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며 자녀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악기를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결코 큰 소리로 야단을 치지 않고 조용히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잘 타일러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아펜젤러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던 예로써 한 번은 그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거지가 그의 집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펜젤러는 저녁 식사 중에 그 거지를 자기 방에 들여놓고 자기와 한 식탁에서 음식을 차려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거지가 음식을 다 먹고 가려고 할 때에는 자기가 입던 옷을 주고 얼마의 돈도 주었습니다. 아펜젤러는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주위의 강대국들, 특히 일본, 중국, 러시아가 으르렁대며 싸우는 짐승들처럼 우리나라를 중간에 두고 서로 노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도층은 너무도 무식하고 힘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소망과 요구는 거들떠보지 않고 남의 나라 세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켜가기에 바빴습니다. 이때 미국으로 망명 갔던 서재필 박사가 기독교인이 되어 귀국하여 정동의 아펜젤러 목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서재필 박사와 아펜젤러 박사는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외치며 독립신문을 창간 발행하였고, 또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배제학당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우리 민족을 무지한 가운데서 빨리 깨우치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여 민중들을 계몽시키는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립협회의 중요 간부들인 서재필, 이상재, 윤치옥, 남궁억, 이승만, 안창호 등과 배제학당의 여러 학생들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여러 차례 강연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종로 거리에서 강연을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아 일부러 배재학당 학생들이 서로 싸움을 하는 것처럼 두 편으로 갈라져서 오르니 그르니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으니까 금방 수십 명이 모여 강연을 하였습니다. 강연 내용은 주로 우리 민족은 굳게 뭉쳐야 하며 자주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했던 강연이 오늘날 노상 강연에 처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큰 소원이었던 교회당 건축으로 아름다운 정동교회가 완공되었고, 교인들은 계속해서 불어났으며, 또 배제학당에도 학생들이 계속 몰려와 아펜젤러 목사는 더욱 바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아펜젤러 목사님은 우리 민족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 신약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서 번역은 참으로 어려운 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생활을 한 지는 오래됐지만 우리말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감옥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특히 독립협회에 대한 갑작스러운 탄압으로 인해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한때 독립협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 중 구속된 사람이 약 4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게 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아펜젤러가 가르치고 사랑했던 배제 악당 출신들과 정동교회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특히 청년 이승만은 서울 종로 거리에서 열렸던 만민공동회에서 그 당시 정부의 능력이 없음과 잘못하는 처사에 대하여 아주 날카롭게 공격한 결과 정부의 미움을 크게 받아 죄수 중에 죄수로서 감옥 속에서도 가장 음침한 지하 감옥에 갇혀 온몸이 쇠사슬로 묶이고 도망하지 못하도록 발은 무거운 철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름에는 빈대 벼룩 모기에게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으며, 겨울에는 모진 추위와 불안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심한 고통에 견디다 못하여 그는 드디어 감옥을 탈출할 것을 각오하고 어느 날 밤에 높은 담장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순찰 중인 간수에게 발각이 되어 오히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청년 이승만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자연이 과거 배제학당에서 아펜젤로에게 배웠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어! 나의 조국과 나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그가 감옥 속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가까이 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밝은 빛이 들어오고 깊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정신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참된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펜젤러는 종종 이승만 등이 갇혀 있는 감옥에까지 찾아가서 그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해 주고, 신약 성서와 믿음, 생활에 필요한 많은 책들을 감방 안에 넣어주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책들을 읽으면서 더욱더 깊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옥 속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까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 감옥에서 남궁억, 이상재 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좋은 인상을 가졌던 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늘 즐겁게 해주는 재치와 유머가 풍성했습니다. 고달픈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재치있는 말로 그들의 고민을 덜어주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울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아펜젤러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쾌활한 미국인의 재치 있는 말 때문에 그의 주위에 많이 모여들었으며, 이러한 것이 기회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신자가 되는 이가 많았습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가정환경이나 공부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애국심이 강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펜젤러 목사님의 주위에는 나라 사랑에 많은 애국심이 불타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으며, 아펜젤러 또한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국어 연구의 선구자 주시경 선생 또한 일찍이 아펜젤러를 알게 되어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열심히 한글 연구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활이 너무나 가난하여 비록 공부는 시작하였으나 돈을 벌어서 집안 살림에 보태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아펜젤러는 물질적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배제 악당 인쇄소에서 일을 하면서 한글 연구에 있는 힘을 다 쏟았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하루에 아침, 점심은 굶고 저녁 한 끼로만 지낼 때가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궁핍한 중에서도 불평 없이 교육의 뜨거운 사랑을 익히고 실천한 진실한 교육자였습니다. 별로 웃지는 않으나 그 눈에는 남다른 사랑의 정과 너그러움이 넘치며 점잖으신 모습은 보는 사람을 탄복하게 하였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무명옷에 집신을 신고 한결같이 제자들을 가르친 주시경 선생 그도 아펜젤러 선교사와의 깊은 대화와 인격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살게 된 지 15년째 되는 해, 그의 나이 42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와서 이젠 주름살이 많이 생긴 장년으로 변하였으며, 그의 몸에는 한국의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이제 아펜젤러의 이름은 서울 장안은 말할 것도 없으며,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 황제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야위었고, 그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서 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1900년에는 그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이하여 고국인 미국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을 향해 간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동안의 우리나라 백성을 위한 공로를 훌륭하다고 칭찬하여 푸짐한 선물을 내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황제의 축복 속에 아펜젤러는 여러 선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의 풍성한 환송을 받으면서 1900년 9월 28일 오후 5시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을 지나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미국 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에서 같이 일할 선교사 지망생의 모집을 위하여 힘썼습니다. 미국의 감리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와 광고를 통해서 한국 선교사 지원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친구들을 찾아가서도 이와 같은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아펜젤러를 본 미국의 가족, 친지들과 친구들은 너무나 늙어버린 아펜젤러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부친과 친족들은 야윌대로 야윈 핏기 없는 그의 안색을 보더니 한참 동안이나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의 친구 와트는 한국의 날씨가 그에게는 너무 험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면서 아펜젤러를 붙들고 한국에서 일하지 말고 미국 필라델피아 연회에서 함께 일하자고 사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을 이미 한국과 한국 민족을 위하여 내주어 버렸다. 나는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나를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아마 하늘나라도 세계가 잘 알지 못하는 조용한 나라 한국에서 가게 될지 모른다. 하늘나라는 미국이라 해서 더 가깝고, 한국이라 해서 더 멀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조용하면서도 힘찬 어조로 그의 각오를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와트는 더 불안해져서 그러면 좀 더 쉬었다가 한국에 가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 목사님은 “아니다. 친구야, 나 없이 나의 한국인 동역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의 가족들을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딸 엘리스가 심한 병으로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그는 병 중에 있는 딸 엘리스가 몹시 걱정되었으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아펜젤러가 다시 서울에 돌아오자 텅 빈 것 같았던 선교부는 다시 활발한 기운이 넘쳐흐르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미국에 두고 온 가족들도 잊어버릴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국의 감리교회도 그동안 크게 성장하게 되어 교인 수가 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펜젤러 목사는 모어 감독을 모시고 1901년 6월 1일 주일 예배를 드리려고 스웨어로 목사와 함께 모친의 교회로 떠났습니다. 서울 가까이에 있는 이 무치네 마을 교회는 2주일 뜻밖의 손님들을 맞이하려고 태극기와 십자가를 걸어놓고 크게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이 한창 경부선 철도를 설치하고 있던 때라 서울에서 이 마을에 들어가려면 할 수 없이 새로 만들어 놓은 철도 뚝을 건너야 했습니다. 모어 감독과 여선교사들은 인력거를 타고, 아펜젤러와 스웨어로 목사님은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인력거가 철도둑을 막 건너고, 두 사람도 자전거로 뚝을 건너려는 순간 이를 본 일본 노동자가 달려와서는 두 사람을 가로막고 뚝을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예배 시간은 다 되어가고, 또 상대편이 일본 노동자이므로 아펜젤러 목사는 그에게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아펜젤러 일행을 러시아 간첩으로 잘못 생각한 일본 노동자 몇 명이 몽둥이를 들고 와 휘둘러서 아펜젤러와 스웨어러의 이마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노동자 세 사람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이 사건의 피해자로서 법정에 나가서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아펜젤로는 주일 예배를 끝낸 다음 날 목포에서 모이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이 증언에 할 수 없이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펜젤러는 6월 11일에야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그의 비서 겸 서기였던 조완규 씨와 집이 목포인 정신학교 학생 2명을 데리고 목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일본의 대판 상선 회사에 속한 558톤 정도의 배로서 일주일에 두세 번 인천 목포를 다니는 배였습니다. 인천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향해 가는 배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가고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목포 근해에 이르렀을 때 목포에서 인천을 향해 오는 상선이 있었는데 아펜젤러 목사가 탄 배보다 훨씬 더 큰 배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늦은 아침이 서로 신호가 없었기 때문에 두 배는 속력을 다하여 달리다가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아펜젤러가 탄 배는 작은 배여서 몹시 파괴되어 배 앞머리로부터 약 6m 가량이 파손되어 충돌 후 1분 20초 정도 되어 앞머리는 물속으로 잠겼습니다. 이때 아펜젤러는 바람을 쏘이러 가판 위에 있다가 갑자기 배가 충돌하여 다행히 튕겨서 큰 배 위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와 함께한 일행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보고는 번개같이 다시 자기가 타고 가던 배로 가서 그들을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엄청난 파손을 입은 배가 물속에 빠져들어감으로 아펜젤러도 물에 빠져 그만 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남을 위한 희생, 봉사, 사랑으로 꽉 찬 그의 정신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최후의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암흑과 무지로 가득한 조선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찾아와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7년간 보여준 삶,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는 오직 생명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한국은 우상숭배와 무지로 가득 찬 나라였지만 그가 죽어 한국을 떠났을 때 이제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목숨을 바치기까지 한국을 사랑한 아펜젤러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 선교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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