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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세계를 뒤흔든 종교개혁자

  • 이은아 목사
  • 2024-10-28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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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세계를 뒤흔든 종교개혁자
https://youtu.be/vKF8Y0p-Xb4?si=h0X69nrrBLrbSihJ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터와 그의 아내 마가렛 사이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만스펠트 지역으로 이사해 처음에는 광부로 일했습니다. 탄광촌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이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주일마다 부모님을 따라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신부는 높은 재단 위에서 라틴어로 예배를 인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어린 루터에게 하나님은 항상 루터를 내려다보고 계시다가 잘못하면 바로 벼락을 내릴 것 같은 무서운 존재였기에 늘 두려워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14이 되었을 때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새로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는 신앙생활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루터는 라틴어를 잘 배워서 훌륭한 학자가 되기로 입학하면서부터 다짐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공부하기도 하였는데, 마르틴도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형편이 좋지 않아 구걸하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안할트의 빌렐름 공자가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날트는 독일을 이루고 있는 큰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행차가 당연히 있어야 할 수행원과 말 마차따위는 보이지 않고, 루터가 본 것은 가난하고 남루한 수도사였습니다. 등에는 커다란 동양 자루를 메고 있었습니다. 오랜 고행과 금식으로 뼈와 가죽이 달라붙어 있는 앙상한 몸집, 너무 말라 움푹 들어간 눈, 고생으로 주름진 얼굴, 공자의 마음에는 천국을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14살 감수성이 예민한 루터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루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비렐름 공자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루터는 반드시 성공하여 맏아들인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께 보답을 해야 했습니다.

 

1년 후 아이센나하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책이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라틴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루터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라틴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카톨릭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랐지만 루터는 21살 때 대학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했습니다. 그는 큰 기쁨 속에서 라틴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보물을 하나 소유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매료되어 갔습니다. 특히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와 어린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가 위험한 병에 걸릴 정도로 성경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502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22살 되던 1505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문학 석사가 된 루터는 다시 법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대준 아버지는 루터가 부와 명예를 함께 얻기 원했기에 법관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루터는 집에서 여름방학을 지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온 하늘을 뒤덮더니 금세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겁이 많던 루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루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쏟아지는 빗 속에 번개까지 번쩍였습니다. 천둥까지 우러대자 루터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가까스로 느릅나무 아래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번쩍하더니 벼라기 루터가 뛰어든 느릅나무를 내리쳤습니다. 나무가 갈라지며 금세 시커멓게 타버렸고, 루터는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저를 구해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저를 살려주신다면 기꺼이 학업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루터는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마르틴 루터는 결국 한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어거스틴회에 속한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수도사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싸워야 합니다. 음식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만 먹게 될 것이며,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을 서약해야 합니다. 내 허락 없이는 이 수도원의 담장 밖을 나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짐을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네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루터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이름난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나중에야 수도사가 된 사실을 아버지께 알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루터의 동생 2명이 모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터가 병에 걸려 죽는다면 법학을 공부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이든 아버지는 루터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루터야! 미안하다. 네가 그 길을 가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겠구나.” 편지를 받은 루터는 너무 기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루터는 정식 수도사가 된 다음 더욱 엄격하게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서원했던 그대로 정결과 가난과 복종의 삶을 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다했습니다. 사흘 이상 빵은커녕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혹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배 시간에 실수로 동료 수도사의 발을 밟은 것까지도 철저히 회개하기 위하여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피가 터지도록 회초리로 자기 발등을 사정없이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또 동료 수도사가 신경통을 앓고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어찌하여 동료가 앓고 있는데, 그것도 미처 몰랐단 말인가 다른 형제에게 그처럼 무관심했다니 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 하고 탄식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온 즉시 회초리를 잡고 자기의 몸을 30번 내려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마르틴 루터는 죄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았고, 혹시 마음속에 조그마한 못된 생각 하나라도 들어오면 곧바로 횟조리를 들고 자기 몸에 벌을 내렸습니다. 용서의 은혜와 죄 성결함과 유혹은 루터에게 끊임없는 고통이자 숙제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어느 날 어거스틴 수도회 총대리인 슈타우피츠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수도사가 된 후로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일이 없고,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그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며 고치려고 노력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심한 체벌로 기절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도 왜 제 마음에는 구원의 기쁨과 평화가 전혀 없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루터 형제 오늘부터 로마서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우리의 죄가 벌써 다 용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동시에 얻어지는 것이지요. 루터 형제는 아직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후로 신부님들에게나 교수님들에게나 이곳 수도원의 지도자들에게서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말을 듣고 난 후 그를 잠시 바라다 보더니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요. 이제부터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회초리를 잡지 말고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쳐다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깨달으면 당신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죄인은 절대로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 믿음으로써만 모든 것이 의로워지는 것이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마르틴 루터의 가슴에선 기쁨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왜 좀 더 일찍 로마서를 보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웠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새로운 깨달음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에게 사제가 될 기회도 주었습니다. 슈타우피츠는 수도사가 되기 전에 이미 충분한 학식과 교양을 갖춘 루터가 사제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온 후 2년 동안 떠나있던 에르푸르트 대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법학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고 15074월 드디어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게 됩니다.

 

15075월 드디어 루터는 신부가 되어 첫 미사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재단 앞에 서서 시편을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시편을 낭송하는 루터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시편을 읽는 것뿐이었는데, 이제 겨우 미사를 시작했을 뿐인데 루턴은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와 몸을 떨었습니다.

내가 뭐길래 감히 하늘의 왕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스치자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루터를 짓눌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금방이라도 나타나셔서 루터 감히 죄 많은 손으로 미사를 인도하다니 하며 불을 던지실 것만 같았습니다. 루터는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미사를 인도했습니다. 미사가 끝났을 때는 거의 쓰러질 듯 온몸에 맥이 다 풀려버렸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루터는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직도 미사를 인도하던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는 아버지가 한마디 위로를 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직도 제가 수도사 된 것이 못마땅하신가요? 저는 아주 경건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뭐 경건하고 평안해 넌 배웠다는 놈이 니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도 모르느냐? 네 놈이 평안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니 애미 애비는 늙도록 밥벌이를 하고 있단 말이다.” 루터는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날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걸요. 그리고 저는 제가 원해서 수도사가 된 게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폭우가 치던 날 하나님이 절 부르셨다고요. 저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루터는 아버지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루터의 삶을 뒤흔드는 말을 쏟아부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네가 들은 음성이 마귀의 소리가 아니었기를 빈다. 루터는 아버지를 만난 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버지의 말처럼 사탄의 장난은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1511년 가을 루터에게 로마를 다녀올 기회가 생겼습니다. 슈타우피츠 총대리가 어거스틴 수도의 규칙을 조정하기 위해 루터를 로마로 보낸 것입니다. 그는 동료인 나딘 수도사와 함께 걸어서 다녀왔습니다. 그들의 걸음으로 가려면 로마까지는 빨라야 한 달 반 정도 걸렸습니다. 낮에는 로마를 향해 열심히 걸었고, 밤이 되면 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아가서 쉬었습니다.

루터는 로마 여행을 통해 자신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기 원했습니다. 루터는 4주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면서 로마 곳곳에 있는 성지들을 방문했습니다. 카타콤을 둘러볼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스칼라 산타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계단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올라가신 계단을 옮겨다 놓은 성지였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들은 앞을 다투어 그 계단에 입을 맞춘 후 무릎을 꿇고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무릎으로 28계단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무릎이 깨져서 피가 나거나 멍이 드는 게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행 가운데에도 계단 끝까지 올라가면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을에 한 번씩 오르려고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무릎을 꿇고 기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간쯤에 이르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무릎이 다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릎이 벗겨지고 고통을 받아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마음가짐이 어떻든 무릎이 터지도록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단 말인가?” 바로 그때 로마서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벌떡 일어나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에 가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왕궁보다 몇 배나 더 크고 화려한 성당, 그 안에 가득히 장식된 당대의 명화들, 수많은 순교자들의 묘지와 유적들, 그리고 초대 성도들의 지하 예배실 카타콤 이러한 것들로 로마는 제2의 성지라고 불릴 만큼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부의 거대함과는 달리 교황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제들은 한결같이 타락의 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세상 사람들까지도 부정과 음탕과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다녀온 후 루터가 더 큰 혼란과 갈등에 빠진 것을 보고 슈타우피츠 총대리는 루터에게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512년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고 29에 신학 박사가 됩니다. 루터가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성경 과목이었습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교과서로 사용했는데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익혔습니다.

그는 1513년 봄에 시편 강의를 하기 시작하면서 강의를 준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조금씩 신앙의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0편 강의를 마친 후 1515년에는 로마서 강의에 들어갔습니다. 로마서는 이전에 그가 의로움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할 때마다 읽으면서 큰 힘이 되었던 성경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수업을 위해 로마서를 정독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그를 따라다니던 두려움을 모두 던져버릴 구절을 찾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고해 성사를 하고 회개를 하고 고행을 했지만 그 어느 노력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그가 시편을 강의하면서 계속 입으로만 말하고 루터 자신도 깨닫거나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의를 이제는 깨달은 것입니다. --

 

루터는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강의는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성경을 연구할수록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한 성당의 정문 앞에는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예배 때에는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특별히 광고까지 했습니다. 면죄부 판매위원장인 유안테첼이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금화가 면죄부 판매통 속으로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을 수가 있고, 연옥에 벌써 떨어져서 고생하고 있는 부모 형제의 불쌍한 영혼도 당장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교황 레오 10세께서 면죄부 명령서에 친히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1513년 율리우스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레오 10세는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있을 동안 가장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계획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돈이 필요했는데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이미 교황청의 금고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에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이트 대주교가 힘을 보탰습니다. 알브레이트는 이미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의 대주교를 맡고 있었는데, 마인츠 대주교 자리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한 사람이 하나 이상의 공직을 맡을 수 없고, 게다가 알브레이트는 그때 30살도 안 된 젊은이였기 때문에 그가 마인츠의 대주교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알브레이트는 푸어 가문에서 큰 돈을 빌려 교황에게 주었고, 교황은 그것을 받고 흔쾌히 알브레이트를 마인츠 대주교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제 알브레이트는 빚을 갚기 위해서,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두 사람의 욕심은 결국 면죄부를 탄생시켰습니다. 드디어 독일에서 면죄부가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알브레이트는 면죄부 판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유한테트엘 수사를 내세웠습니다. 페첼은 면죄부가 죽은 사람을 연옥에서 꺼내줄 수 있는 천국행 티켓이라며 선전했습니다. 테첼은 감동적인 목소리로 호소했고, 면죄부는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루터는 면죄부가 독일 전역을 쑤시고 돌아다니자 강도를 높여 면죄부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똑똑히 들으십시오. 면죄부 판매는 불법입니다. 속지 마십시. 죄의 용서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뉘우쳐야 합니다. 가슴을 찢으며 뉘우쳐야 하고, 참된 마음으로 고해를 해야 하며, 그 잘못에 대한 철저한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면죄부에 대한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며칠 밤을 잠도 자지 않고 면죄부 판매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입니다. 면죄부 판매 행위를 비롯하여 그동안 그가 보아왔던 교회의 부조리, 성경을 떠난 교회의 잘못된 사항을 낱낱이 적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성경에서 진리를 만날 수 있고, 그 진리를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솔직하게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그런 심정으로 선언문을 써냈습니다.

 

그리고 15171031 드디어 마르틴 루터는 질긴 종이의 큰 글자로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당에 정문에 붙였습니다. 루터는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일생이, 그리고 세계의 역사가 뒤바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루터의 글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사람들 사이에 나돌았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독일 거리에서 루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의 횡포와 면죄부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시민들 사이에서 루터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루터의 글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가장 화가 난 사람은 당장 돈을 벌어 빚을 갚아야 하는 마인츠의 대주교 알프레드였습니다. 알프레드 대주교는 당장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고, 교황은 어거스틴 수되회 대표를 불러 어거스틴 수도회 내에서 루터를 잘 달래거나 입을 막으라고 명령합니다. 무엇보다도 면죄부 판매를 하는 테체 수도사가 루터를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테첼은 수많은 교황의 교서들과 교회의 전통을 비추면서 면죄부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주장하는 책을 써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루터는 95개조 논제에 대한 확답이라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의 책이 출판된 다음에는 그에 대한 반대자들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에 대해 루터가 설교로 질책을 하면 또 다른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루터가 반박하는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출판 전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렇게 논쟁이 과열되면서 루터의 생각은 점점 더 교회를 공격하는 쪽으로 굳어졌습니다. “교황도 실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회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성경에만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당시로서는 이런 말이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교회가 바로 나라 전체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조차도 교황의 파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세상에 교회가 파문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자식으로 변하는 건 아닙니다. 죄가 있어 파문 당하더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억울하게 파문당한 거라면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니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교황은 궁리 끝에 카제탄 추기경에게 루터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카제탄 추기경은 교황의 특사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리는 종교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 황제도 불같이 화를 내며 루터를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교황에게 썼습니다. 교황과 황제와 추기경이 모두 한 뜻이 되어 루터를 공격하게 된 셈입니다. “루터를 아우크스부르크로 보내 카제탄 추기경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시오.” 교황의 명령을 받은 프레드릭 백작은 고민에 쌓였습니다.

이제 루터 앞에 기다리는 건 형식적인 재판과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영대뿐입니다.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의 길을 막았습니다. “차라리 잠시 다른 나라로 피해 있는 것이 어떤가?” 루터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곳이 화영대라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오. 그곳에서도 주님은 살아계실 테니까요.” 루터는 무거운 걸음으로 죽음의 땅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루터의 마음속에는 음흉한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정말로 내 생각이 옳은 거야. 너 말고는 세상에 잘난 사람이 없단 말이지.” 루터는 성경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오직 성경밖에 믿을 것이 없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에 거의 다달랐을 때 갑자기 루터은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위경련이 일어난 것입니다. 추기경은 다정한 말로 루터를 권했습니다.

루터 형제 자네가 여러 책을 통해 면죄부를 공격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러나 1343년 발표된 교황 클레멘스의 교서를 보게 교황은 신실한 자들을 현세에 처벌해서 풀어주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나와 있네. 당장 95개조 반박문과 그와 관련된 자네의 주장을 취소하게

존경하는 추기경님. 교황님의 교서는 성경이 아닙니다. 저는 교황님이 인간적으로 쓴 교서 때문에 성경에 그 많은 증거를 버릴 수 없습니다.”

논쟁은 3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어떻게든 루터의 입에서 취소하겠다는 말이 나오게 하려는 추기경과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잘못된 것이라는 루터의 주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카제타는 인내심이 바닥나 취소한다고 말하기 전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며 루터를 내쫓았습니다. 루터는 외로운 싸움을 혼자 싸우다가 지친 검투사 같았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제자를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 자네는 어거스틴 수도회 사람이 아니네. 교단 대표로서 난 자네의 이름을 우리 수도에서 빼기로 결정했네.”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수도회의 사슬에 매이지 않도록 오히려 루터를 풀어준 것이었습니다. 이제 루터는 무슨 말을 하든 어거스틴 수도회에 욕을 먹지 않을까?’ 하는 고민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사람들 몰래 도망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치 죄수가 도망치듯 루터는 성벽으로 가는 후미진 길로 도망쳤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성주인 프레드릭 백작이 루터를 불렀습니다. 카제탄 추기경에게서 온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루터를 로마로 보내 교회의 공정하고도 엄정한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장 실력 있는 학자를 죽음의 길로 넘겨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를 보호하면서 로마 전체와 교회를 대항해 싸워야 하는지 백작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루터를 내놓으라고 압박해 왔습니다. 그럴수록 백성들 사이에서 루터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습니다. 주일이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사람들로 성전은 가득 찼습니다.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황은 면죄부에 대해서 새로운 교서를 내렸습니다. “면죄부는 교회가 정한 벌을 줄일 뿐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인서는 아니다.” 교황이 한 발 물러선 것입니다. 그러자니 누군가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면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테첼이 퍼뜨린 것이오, 테첼은 면죄부를 팔아 자신의 재산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사생아를을 둘이나 낳아서 테첼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재산을 늘려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도 사실이고, 순결 서약을 어기고 자식을 낳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테첼은 라이프치히의 한 수도원으로 도망가 몇 달 뒤 원통해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교황과 황제는 서로 큰 권력을 가지려고 늘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막시밀리안 독일 황제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황제를 뽑아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황제는 7명의 제우가 모여 투표로 뽑았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프레드릭 백작입니다. 프레드릭 백작은 황제의 손자인 카를로스 1를 지지했습니다. 교황은 카를 치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젊고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레드릭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교황이 프레드릭과 잘 지낸다는 건 루터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잉골슈타트 대학 교수인 요한에크가 라이프치히를 다스리는 조지 공작에게 루터와 토론회를 하고 싶다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 논쟁은 18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루터는 논쟁 중 이단으로 낙인 찍힌 후스를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루터의 지지도는 높았기에 사람들은 이제 후스조차도 자기 편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루터의 영향력이 커져 있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루터가 이단자 후스를 옳다고 하니 에크는 루터를 넘어뜨릴 좋은 이유를 찾아낸 셈이었습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교황이 보낸 군대가 루터를 체포해 화영대로 끌고 갈 것만 같았습니다. 학생들이 루터를 에워싸고 지키면서 간신히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교황 쪽에서 루터가 이단인 증거를 확실히 잡았다며 의기양양하고 있을 동안 루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듯 높아졌습니다.

 

루터가 맨 처음에 쓴 95개조 반박문을 비롯한 여러 설교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몇 달이 안 돼 동이 났습니다. 이제 유럽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되기까지 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혼자서 수백 부를 사서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에서도 수백 부씩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루터는 독일의 영웅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라이프 논쟁이 끝난 뒤 1년 동안 루터는 교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 5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중 [교회의 바벨론 포로][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충격적인 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루터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 살펴보다가 불같이 화를 내시며 지옥과 연옥에 가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상대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에크는 라이프치의 논쟁을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화가 나서 루터를 파문한다고 했습니다. 파문하기까지 60일간의 시간을 주어 그 사이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면 용서해 주고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펴면 파문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름스 국회에서도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루터를 소환하였습니다. 루터는 황제가 보낸 말을 타고 보름스로 갔습니다. 보름스에 점점 가까워지자 시가지에 감도는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라이프치 논쟁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보름스로 몰려왔습니다. 여관마다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우리 주님도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나와 환영을 했었지.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 루터는 환영하는 인파를 보면서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놓인 이 책들이 모두 박사님의 책인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책이 다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중 일부를 취소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조심스럽게 답변하고 싶습니다. 하루만 여유를 주십시오.”

사람들은 술렁거렸습니다. 다음 날 황제는 더 큰 방에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주장을 계속 펴시겠다는 말입니까? 1500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는 모두 잘못된 것이고, 당신 혼자만 성경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입니까? 교황님 말씀대로 토론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주장을 취소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저는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잘못이 있다면 성경으로 증명해 주십시오. 성경으로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대주교들이 머리를 싸맸지만 성경에서는 지적할 만한 구절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루터를 정죄하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름스 측령이라고 부릅니다. 황제는 보름스 측령에 사인을 했습니다. 일단 약속대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은 보장하겠소. 황제가 베푼 최대한의 아량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말을 몰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무장한 병사들이 루터의 마차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더니 루터의 머리에 검은 두건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루터를 빼돌려 숨겨두어라. 그리고 어디 숨겨두었는지 나에게도 말하지 말라. 그래야 깨끗한 양심으로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프레드릭 백작이 자기 부하에게 내렸던 지시입니다. 루터는 어둠 속에서 끌려 밤 11시가 되어서야 한 성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바르트부르크 요새였습니다. 이곳에 갇혀 있는 1년 동안 루터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냅니다. 바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반역처럼 여겨졌습니다. 루터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싸워온 지난 5년 동안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달 뒤 루터는 바깥의 소식을 들으면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루터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친구들은 큰 위로를 받았고, 동시에 반대자들은 겁을 먹었습니다.

 

루터가 죄수처럼 갇혀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동안 독일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시작한 변화입니다. 사제만 거행하던 성찬식이 모든 평신도에게 베풀어졌고,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과 맞물려 농민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귀족과 교회의 횡포에 눌려 살던 농민들이 여기저기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강조했는데, 농민들은 미천한 사람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루터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지만 농민들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비텐베르크 의회는 루터를 초청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농민들은 1525년 대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루터 나이 41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지 3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루터는 평화를 권고하는 글을 썼습니다. 칼은 하나님이 지배자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폭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넉 달이 채 못 되어 농민전쟁은 참담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습니다. 농민 전쟁으로 인해 루터는 개혁의 뒷자리로 물러났습니다. 민중들이 루터에 대해 강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농민전쟁이 한창일 때 12명의 수녀가 수녀원을 나왔습니다. 그중 9명의 수녀는 루터가 머무는 수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그 수녀들의 중매를 서서 한 명씩 떠나보냈으나 단 한 명은 카타리나만이 아직 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터는 자신이 언제 화형당할지 모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카타리나가 루터와 결혼하겠다고 하여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루터는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여섯 자녀를 두었고, 친척 가운데 고아가 된 아이를 넷이나 더 보살폈습니다. 이들을 키우기 위해 하숙까지 쳤으므로 루터 집 안에서 같이 먹고 자는 사람들은 25명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하숙하러 온 청년들은 모두 루터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식사를 할 때도 수첩을 들고 와 루터가 하는 말을 받아 적었습니다. 이 제자들의 수첩은 루터가 죽은 뒤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도록 루터의 화형이 집행되지 않은 이유는 그 사이 북부 독일의 많은 지역이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루터를 따르는 교회 세력이 교황을 따르는 가톨릭보다 커졌습니다. 그러니 루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드까지도 루터에게 손을 내밀어 루터의 결혼식에 손을 보내고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도 구하는 시기였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가르치며 새로운 예배의 모범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찬송가도 39편이나 지었습니다. 루터의 찬송가는 새로운 예배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경을 가르치며 성경을 번역하고 책을 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50살이 되던 1534, 드디어 독일어로 된 신구약 성경이 나왔습니다. 이 성경은 루터가 하나님 나라로 가기 직전까지 12년 동안 계속해서 수정 보완되었습니다.

62살이 되던 15462, 루터는 두 백작의 집안싸움을 화해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교회에서는 루터의 찬송가를 부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던 그의 신앙고백이 교회와 우리 마음에 살아있는 것을 증명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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