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삶

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 성인들의 삶

성인들의 삶

김익두 목사의 생애 | 한국의 위대한 부흥사 | 불의사자 | 순교자

  • 이은아 목사
  • 2025-09-19 15:51:00
  • hit575
  • 115.20.178.30

김익두 목사의 생애 | 한국의 위대한 부흥사 | 불의사자 | 순교자

https://youtu.be/mGqU_otiFJQ?si=QMoFOLaXmblhycmf

 

 

 

불의 사자, 순교자 김익두 목사의 위대한 생애

김익두 목사님은 1874113,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철리에서 아버지 김응삼과 어머니 전익선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부친 김응삼은 부유한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동네 노인들을 공경하여 주민들의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어린 시절에 총명한 김익두 목사님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며 천재적인 총명함으로 열 살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셨습니다. 부친은 총명한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켜 출세시키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에게 유일한 희망을 걸었던 아버지는 이 충격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고, 세상을 떠나시기 전 아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읜 김익두는 깊은 인생의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장차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들이 그의 마음을 맴돌았습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고자 그는 불교에 입문하여 구월산 패엽사라는 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설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어 방황 끝에 절을 떠나게 됩니다.

절을 나온 김익두는 자전거를 타고 평양과 고향을 오가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정직한 성품 덕분에 길에서 주운 돈주머니를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이로 인해 한 상점의 지배인으로 발탁되어 큰 신임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직함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귀중품을 맡기는 무료 전당포 역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나락과 영적 갈급함/

생활이 안정되자 김익두는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신혼 생활의 즐거움도 잠시, 친구의 부탁으로 연대 보증을 섰다가 사기를 당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과 집을 모두 잃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낙심한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술에 취해 장터에 나타나 상인들의 물건을 짓밟는 등 난폭한 행동으로 *"깡패 김익두"*로 악명이 높았으며, 장꾼들이 장에 오기 전 성황당에 들러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습니다. 그는 원래 불꽃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그 열정이 삐뚤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참된 진리를 찾고 있었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 가슴속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극적인 회심과 '불의 사자'로서의 탄생/

그러던 어느 날, 장터에서 서양 선교사의 전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건넨 전도지를 무심코 읽던 김익두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라는 성경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세세토록'이라는 글자에 주목하며 영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친구 박태환의 권유로 이웃 마을 금산교회에서 열린 스왈론 선교사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는 스왈론 목사의 영생에 대한 설교는 김익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드디어 스왈론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과거의 모든 죄를 진심으로 자백했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를 위해 "하나님이여,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고, 성경책을 건네며 부지런히 읽으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날부터 김익두는 미친 듯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몰랐던 진리를 깨닫는 기쁨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옛 술친구 김선봉에게 전도했고, 김선봉은 곧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두 친구는 술 마시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져 술집 기생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진심에 감동한 기생들이 눈물로 회심했으나, 김선봉이 이별주라며 무심코 건넨 술 한두 잔에 김익두는 마치 감전된 듯 충격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3일간의 혼수상태와 통곡 끝에 회복된 그는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된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 전념하여 가족들이 그가 미쳤다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를 본받아 산에서 금식 기도하던 중, 마지막 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너는 불의 종이 되어라! 너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신유와 회개로 진동시키고 한반도를 성령의 물결로 휩쓸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의 몸과 영혼은 불덩어리가 되었고, 기미또(김익두)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어 *'불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믿은 지 한 달 만에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헌신을 선포하여 모든 교인이 놀라워했으며, 교회에 새로운 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재령과 신천 교회의 부흥 세례를 받은 김익두는 불신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깡패 시절 장꾼들을 괴롭히던 그 장터에 성경을 들고 노방전도자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과거 그에게 맞고 피해를 입었던 상인들이 그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는 모든 수모를 받아들이며 "나는 과거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여러분 앞에 회개하러 나왔으니 실컷 때려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 그의 진심 어린 참회와 뜨거운 전도에 감동받아 현장에서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하고 노방전도에 나선 김익두의 소문이 퍼지자, 재령교회에서 담임 전도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서울의 한 약방에서 월급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으나, 재령교회의 월 사례비는 고작 30원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왕 종살이할 바에는 돈 많이 주겠다는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살이가 옳다"고 결심하고 서울의 제안을 포기한 채 재령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재령교회는 남자 교인 1, 여자 교인 10명에 불과했으나, 김익두 전도사가 부임하여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자 어린이들부터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어른들의 회개로 이어져 재령교회는 크게 부흥했습니다. 재령교회의 목회가 성공하자, 이웃 군 신천교회에서 선교사와 협력하는 동사 전도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신천교회 부임 당시 교인이 한 명도 없었지만, 매일 철야 기도하며 6개월 만에 절름발이 여인이 찾아와 신자가 되었고, 이어 남자 거지도 찾아왔습니다. 그의 사랑의 목회 소문이 퍼져 매주 10~20명씩 교인들이 몰려들어 3년 만에 300명의 교인으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냉수마찰을 했으며, 하루 세 번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나 깨나 기도와 성경 읽기, 심지어 길을 걸으면서도 성경 암송에 몰두하여 전신주나 행인과 부딪히기 일쑤였습니다. 교인들의 도움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6년 만인 1910년 제3회로 졸업했고, 같은 해 920평북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38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기적의 부흥사, 신유의 은사

목사 안수 후에도 계속된 그의 목회 진력으로 교회는 700명이 넘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여 새 성전 건축을 결정했습니다. 3일간의 금식 기도 중 노아의 방주 모양의 큰 예배당 환상을 보고 건축 헌금을 했는데, 예상보다 적은 액수였습니다. 김 목사는 다시 기도하며 불신자 부자들에게 헌금을 요청했고, 그들은 놀랍게도 기쁨으로 응답하여 기적적으로 성전 건축을 완공했습니다. 더 큰 기적은 헌금을 한 불신자 부자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기적의 부흥사로 명성을 떨친 김익두 목사님은 처음에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려다 의심으로 실패했으나,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일주일간 금식 기도한 후 다시 도전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후 39년간 수십만 명의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읽고 교인들에게도 성경을 많이 읽도록 강조했으며, 구약 성경 100, 신약 성경 1,000을 하셨습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4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상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성경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깊이 체휼하셨습니다.

1920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2주간 금식하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 연합 부흥회에는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1만여 명이 참석했으며 헌금으로 5천여 점의 현물이 들어왔습니다. 이 집회는 전 세계에 알려졌으며, 당시 김익두 목사의 신유 이적을 반대했던 선교사들조차 감탄하며 "숨 가쁠 만큼 인상적이었다", "사상 최대의 집회였다"고 격찬했습니다. 승동 집회에서 은혜받은 김재준은 목사 및 신학자가 되었, 주기철 목사는 공천 집회에서 성령을 받고 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전국 700여 곳에서 28천 회의 집회를 인도했으며, 총 집회 참석 인원은 1,500만 명에 달했고, 100여 개 이상의 새 교회당을 건축하고 1만여 명의 불구자를 치유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한국교회에 신사참배의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서울 승동교회를 8년째 시무하던 김익두 목사님은 종로경찰서의 강요와 협박,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결국 강제로 체포되어 한 달간 극심한 고문을 당해 빈사 상태에 이르렀고, "승동교회에서 설교 금지, 목사직 파면,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로 석방되어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직전이라는 산골 벽촌으로 쫓겨났습니다.

그곳에서 몸을 추스르며 농사를 짓고, 집에서 떨어진 큰 바위 위에서 매일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뱀들이 몸 위로 기어 다녀도 전혀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45년 신년 벽두에 기도하던 중 "충성된 종아, 내가 너의 충성을 아노라. 내가 너의 인내를 아노니 너의 소원을 들어 주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광복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5년 조국 해방 후,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는 큰 박해를 받게 됩니다. 1946113, 북한 당국은 주일을 투표일로 정했으나 기독교인들이 불참하여 실패하자, 5도 연합 노회의 지도자 목사들을 체포 구금하여 교회 지도 체계를 공백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 틈을 타 기독교도 연맹은 총회를 구성하고 김익두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추대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강양욱 등 기독교도 연맹 간부들이 김익두 목사님의 권위를 이용하여 교인들에게 연맹 가입을 강요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도망갔고 평양에서는 김 목사님이 취임을 승낙했다고 거짓으로 선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김 목사님을 오해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직전194951일 노동절, 김일성의 특별 초청으로 평양 노동절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7일간의 금식 기도 끝에 비장한 각오로 단상에 오른 김 목사님은 김일성 주석 앞에서 성경 야고보서 51-3절 말씀을 봉독하며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해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한 후, "북조선의 김일성 씨를 통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남조선의 이승만 씨를 통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어 "노동자의 만세"를 외쳤고, 김일성을 '장군'이 아닌 ''라고 부르며 이승만과 동격으로 놓는 대범한 발언을 했습니다. 심지어 김일성에게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전도했고, 김일성은 ",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노동절 행사 직후 평양 방송에서는 김익두 목사님의 연설이 며칠간 반복 방송되었으나, 내용은 '노동자의 만세' 대신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로 조작되어 방송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육성을 채취하여 성우를 시켜 조작한 것으로, 그는 해명할 방법이 없어 억울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이 북진하자 김익두 목사님이 계시던 신천 지역에서 반공 청년들이 궐기했습니다. 19501014일 새벽,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라는 소식에 감격하여 교인들과 새벽 예배를 마치고 환영회를 준비하며 기도하던 중, 공산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강단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님은 총격을 받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져 현장에서 6명이 순교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6.25 전쟁 전에도 월남하라는 강권을 받았으나 "죽어도 양 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나"라며 교인들과 고난을 함께 하겠다고 거부하셨고, 언젠가는 순교할 것을 각오하고 계셨습니다. 19501014, 76의 나이로 다섯 명의 신도와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그의 시신은 교회 뒷뜰에 가매장되었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인 1129일에 정식 장례를 치렀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이자 위대한 목사였습니다. 그의 삶은 불꽃같은 열정과 헌신, 그리고 순교로 마무리되며 한국 기독교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김익두 목사님이 예수 제자로서 훌륭한 모습

 

1. 철저한 회개와 완전한 삶의 변화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 술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였습니다. 장터 상인들은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치성을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스왈론(Swallen) 선교사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모든 죄를 쏟아내며 자복했습니다.

회심 이후 그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공개적인 회개: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자복하고 헌신을 선포하여, 교회 전체에 새로운 변화의 분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삶: 과거 자신이 사람들을 괴롭히던 장터로 돌아가, 이번에는 전도자로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맞고 욕을 먹으면서도 "과거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여러분 앞에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날에 실컷 때려 주시오"라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참회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즉석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2. 기도와 성경에 미친 사람

그는 회심 직후부터 "미친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도와 성경 읽기에 전념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 예수님을 본받아 40일 금식 기도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불의 종이 되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새벽 냉수마찰 후 기도회를 인도했고, 하루 세 번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 세례를 받기까지 1년을 기다리며 성경을 100독했습니다. 평생에 걸쳐 구약성경을 100, 신약성경은 1,000독했으며, 언제나 설교의 결론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읽었다"고 고백하며, 특히 복음서의 십자가 장면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3.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복음 전파에 온전히 바쳤습니다.

어려운 대상에게 전도: 회심 후 가장 먼저 전도한 대상은 옛 술친구였고, 이후 기생들에게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결단: 월급이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돈을 많이 주는 약방 지배인 자리 대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며 재령 교회의 전도사직을 선택했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 교인이 한 명도 없던 교회에 부임하여 3년 만에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시켰으며, 전국 700여 곳을 다니며 총 28천 회의 설교와 1,500만 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100여 개의 교회를 건축하고 수만 명의 병자를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나타냈습니다.

 

4.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

그는 일제강점기와 공산 치하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 일제 경찰의 극심한 고문과 협박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강제로 신사로 끌려갔을 때도 일본 형사들이 머리를 억눌렀지만, 그는 오히려 머리를 하늘로 향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공산 정권 앞에서의 담대함: 노동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성경을 봉독하며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김일성을 '장군'이 아닌 '()'라고 부르며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과 동격으로 놓았고, 김일성에게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우상 숭배 거부: 교회 강단에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라는 요구에 "내 목을 칼로 자르라. 우리 교회 강단에는 예수님 사진도 안 거는데 누구의 사진을 거느냐"고 호통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5. 양 떼를 사랑한 목자의 마음

김 목사님은 교인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교인과 함께하는 삶: 주변에서 월남을 간청했지만, "500명 교인들을 어떻게 하고 나 혼자 남으로 가겠느냐"며 거절하고 교인들과 고난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죽어도 양 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다고 월남하겠나"**라며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순교: 결국 그는 19501014, 교회에서 교인들과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던 중 습격한 공산군에게 총격을 받아 5명의 신도와 함께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김익두 목사님은 죄인에서 성자로 완전히 변화된 삶, 성경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깊이 교제한 삶,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한 삶, 그리고 자신의 양 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삶을 통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
댓글작성

열기 닫기

댓글작성
반응형 홈페이지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