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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스 트로터의 생애ㅣ한계를 뛰어넘은 믿음의 여인ㅣ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

  • 이은아 목사
  • 2025-11-18 12: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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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스 트로터의 생애ㅣ한계를 뛰어넘은 믿음의 여인ㅣ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

https://youtu.be/Aov0CJlQV9o?si=RwEg3rBFatz4VSWJ

 

 

 

릴리아스 트로터는 1853714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알렉산더 트로터는 존경받는 증권 중개인으로, 사랑이 많고 친절하며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존중하는 태도로 대했으며, 특히 교도소, 빈민촌, 고아원 같은 공공기관의 상황에 관심을 두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보였다. 릴리아스의 어머니 이사벨라 트로터는 다양한 영역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원 가꾸기와 집 꾸미기부터 지질학과 식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변호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릴리아스 역시 어머니로부터 타인에 대한 관심을 물려받았다. 또한 어머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념이 매우 확고했다.

릴리아스가 12살 때 아버지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릴리아스는 육신의 아버지 대신 하늘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혼자 방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종종 가족들에게 발견될 정도로 신앙이 깊어졌다. 그녀가 어엿한 여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해 주었다. 릴리아스가 남긴 유년 시절의 유품 대부분은 어머니가 선물해 준 스케치북과 미술 도구들이었다.

 

릴리아스는 19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함께 '고결한 그리스도인의 삶 집회'에 처음 참석했으며, 매해 이 집회에 참석하여 영적인 삶의 깊이를 더해갔다. 집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후 릴리아스의 사역에 많은 지원과 도움을 주었다. 1870년대에는 드와이트 엘 무디가 런던에서 연 큰 집회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무디에게서 직접 훈련받았다. 무디는 당시 글 없는 책을 새로운 복음 전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릴리아스는 이 도구를 배워 몇 년 후 언어 장벽이 심한 알제리 지역에도 이를 소개했다.

 

1875년 당시 릴리아스는 선교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봉사활동현재 영국에서 '달동네 사역'이라 불리는 사역의 초석이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여성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일종의 기숙사였던 웰백 거리 단체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87623세가 되던 해, 릴리아스는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두 명의 중요한 친구를 만났다. 한 명은 스위스 집회에서 만나 10년간 선교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로 지낸 블랑쉬 호어스이고, 다른 한 명은 베니스에서 만난 저명한 예술가 존 러스킨이다. 러스킨은 릴리아스가 만약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한다면 현존하는 최고의 미술가가 될 것이며 불멸의 작품들을 많이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릴리아스는 미술과 선교 사역이라는 타오르는 두 가지 열정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라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며칠 동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고민과 기도의 시간이 수년처럼 느껴졌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결국 릴리아스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러스킨의 말처럼 미술에 자신의 전부를 걸면서 동시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는 없다고 고백했다. 이 결정을 내린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런던 사역에 자유로이 헌신할 수 있었다. 러스킨은 이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죽는 날까지 릴리아스에게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주었다. 릴리아스 역시 여전히 미술을 사랑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에 열광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재능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릴리아스는 미술, 음악, 직업 등 해롭지 않고 훌륭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좋은 것을 찾다가 정작 가장 좋은 것(하나님)을 놓쳐버릴 위험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분주한 업무가 끝난 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여 삶의 초점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향하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혼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려 그분을 주목할 때, 그분과 상관없는 수많은 것들이 희미한 형상으로 멀어져 간다고 믿었다.

 

릴리아스는 웰백 거리 단체에서 10년 넘게 일했으며, 웰백이 YWCA와 합병한 후에도 계속 사역했다. 이들은 기도와 복음으로 하나 된 젊은 여성들이 모여 교제를 나누고 상부상조하며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안녕을 도모하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릴리아스는 가난한 매춘 여성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또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찾아가 돕는 구제 사역에 동참했다. 그녀는 자살 위협에 처한 어린 소녀와 밤을 지새우며 구하기도 했고, 길거리의 매춘 여성들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와 취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다.

 

릴리아스가 이 사역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인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그녀는 친구들은 물론 상류사회에서 스스로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상류층 여성은 일을 하는 법이 없었고, 혼자 밖에 나가거나 사창가를 활보하는 일은 더욱이 없었다. 이러한 사역 선택은 사실상 독신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9살이 되던 1884, 릴리아스는 작은 수술을 받았으나 심장이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역의 자리로 돌아왔고,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더 넓은 비전을 보여주셨다. 당시 그녀는 런던 사역에 만족하고 있었고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따분하게 여겼다. 그러나 흑암의 땅, 복음이 한 번도 전파되지 않은 미전도 지역을 마음에 품고 있던 두 친구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님 저에게도 저 친구들처럼 미전도 종족들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 주 안 되어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영혼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그녀 안에 생겨났다. 그녀는 예수님과 대면하는 듯한 경험을 했고, 그분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던 큰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영국을 떠날 생각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녀가 가야 할 흑암의 땅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1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을 떠나게 되었다.

 

릴리아스에게 먼 곳의 미전도 선교지를 향한 갈망이 생겼고, 기도할 때마다 북아프리카라는 단어가 계속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병약한 자매 재클린을 해마다 6개월씩 돌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18875, 한 선교사가 불과 사흘 전까지 아프리카 알제리에 있었다고 말했을 때, 릴리아스는 "알제리가 그렇게 가깝다면 1년 중 반은 그곳에서, 나머지 반은 집에서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알제리는 바로 나를 위한 선교지가 아닌가"라고 확신했다.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모든 의심의 구름이 사라졌고, 알제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릴리아스는 34번째 생일인 1887714일에 북아프리카 선교회의 지원서를 보냈다. 심장이 약했기 때문에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선교회는 그녀를 파송할 용의가 있었으며 계속 이 일을 하려고 하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결국 릴리아스 트로터는 188835일에 알제리로 떠나면서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께 내 전부를 맡긴 기쁨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환희다"라고 말했다. 절친한 친구 루시 루이스와 블랑쉬 호어스가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블랑쉬는 30년간 릴리아스의 영원한 동역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함께 했다. 세 사람은 릴리아스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한 지 9개월 만에 영국을 떠났다. 릴리아스의 일생 전반에 걸친 34년의 삶 자체가 선교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세 여인은 188839일 알제리에 도착했다. 그들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이들 중 누구도 건강 진단을 통과할 조건이 아니었고, 알제리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아랍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알제리 무슬림의 관습은 일상생활과 문화 속에 촘촘히 들어와 있어 변화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루 다섯 번 아랍어로 기도하기, 라마단 기간 30일 금식하기, 자선 활동, 메카 성지순례 등이 대표적이었다.

알제리 도착 몇 주 만에 릴리아스는 병환 중에 있던 동생 재클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6개월 후 다시 만날 것이라 믿었기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루시와 블랑쉬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도록 도왔으며, 집안일이 하나가득 쌓여 있었던 것은 오히려 피곤해서 곧바로 잠들 수 있게 해 릴리아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릴리아스는 온전히 알제리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세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랍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어-아랍어 사전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다시 프랑스어에서 아랍어로 이중 번역하며 아랍어 한 글자씩 번역했다. 후에 전문 교사를 구해 아랍어를 배웠다.

처음 정착한 곳은 도시 내 프랑스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이웃들을 만나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에 초청했다. 아랍어를 배우기 전에도 그들은 아랍어 교사에게 성경 일부분을 번역하도록 부탁해 예쁘게 장식한 카드를 만들었고, 아랍인들이 사는 도시로 가서 그 카드를 나누어 주었다. 카페에서는 종업원에게 부탁해 카드에 적힌 글귀를 모든 손님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기도 했고, 부두로 가서 여러 나라 말로 적힌 카드를 선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통해 아랍어를 사용할 기회를 늘려갔다.

그러나 아랍 여성들에게 다가가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지만 여성들은 모두 아랍어만 사용했다. 게다가 여성들은 항상 집에 고립되어 있었다. 여성은 오로지 남자를 섬기기 위해 태어났으며, 10살이 되면 베일을 쓰고 철저히 분리되어 남자들과 접촉도 전혀 불가능했다.

 

가장 자주 사용한 방법은 아이들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문 앞에서 아이들과 친구가 되면 아이들은 릴리아스 일행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어머니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한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듣고도 "아니에요 그분은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남자들만 사랑하시는 걸요"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선교사들은 계속 기도했고 마침내 어떤 여자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 여자는 세례를 받고 싶어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 낯선 남자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화적인 문제였다. 다행히 그 여자의 남편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는 아내가 선교사 브레딩 씨에게 세례 받는 것을 허락했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여자는 결국 남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릴리아스는 자신이 여성들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생각에 여성 사역에 대한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가정에 있는 여자들을 방문하고, 여자들과 소녀들을 위한 자수 교실과 성경공부 교실을 열었다. 때로는 일가친척의 산소를 방문하기 위해 사람들이 집을 비울 때 방 하나를 빌려 오픈 하우스를 열어 지역 여성들이 와서 쉬고 교제할 수 있게 했다.

대부분의 무슬림 여성들이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릴리아스는 특별히 무슬림 여성들을 위한 기독교 문학이 필요하다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09, 릴리아스는 변화의 조짐을 읽고 동료들에게 편지를 써서 여성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녀는 이 남쪽 땅의 가을 크로커스처럼 소낙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믿음은 항상 아직 보이지 않는 일과 관련된 것이므로 시기상조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독려했다.

 

알제리에 온 지 5년째 되던 1893, 릴리아스는 블랑쉬와 동역자들과 함께 대표적인 슬럼가로 알려진 아랍인이 사는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편지에 프랑스 거리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몸담게 되어 좋다고 썼고, 새로 이사한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내가 이곳에서 너에게 평강을 주리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고 기록했다.

릴리아스는 작은 지터와플을 연주하며 몇몇 여자와 아이들과 친해졌고, 블랑쉬는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그들은 주변의 여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 중 몇 명은 복음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의 환경은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집은 습하고 어두웠으며 공기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고약했고 벽난로도 없었다. 릴리아스와 동료들이 아랍어에 능숙해지고 문화에 눈을 뜨게 되자 사단도 주술, 마법, 마술 등 외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때로 중압감이 너무 커서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새로 거듭난 사람들이 마약이 섞인 음식이나 음료를 먹고 신앙에서 벗어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18933, 릴리아스가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에 블랑쉬와 함께 비스크라라는 사막으로 첫 원정을 떠났다. 알제리에서 남쪽으로 400km 떨어진 곳으로, 당시에는 기차와 낙타를 타고 50k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릴리아스는 사막에 대한 사랑이 더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글솜씨가 그림 솜씨 못지않게 정교하며 섬세한 미적 감각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외곽에 있는 사막에 복음 전도를 위한 기지를 세우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아스는 사막 여행 여건이 어떻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는 유럽인들을 노리는 사막 강도, 전갈, 질병, 무시무시한 들개들의 위협이 많았고, 경험이 없는 가이드와 여자 두 명이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했다. 거대한 모래 언덕들 때문에 길도 제대로 찾을 수 없었고, 모래 폭풍이 작은 표지들을 뒤덮어버리곤 했다. 조금만 방향을 잘못 잡아도 목적지에서 벗어났고, 몇 시간만 지나도 숨이 바짝 마르고 탈수 상태에 빠지기 쉬웠다. 3월의 태양빛 아래서 블랑쉬는 일사병에 걸리기도 했다.

릴리아스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사막의 아름다움 속에서 깊은 고요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때때로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에 이끌린 유혹일 뿐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도 있었다.

몇 년 동안 사역의 패턴이 생겼다. 봄이나 때로는 가을에 외부에 있는 마을로 원정을 나가 복음을 전하거나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마음을 굳건히 했다. 가장 무덥고 불쾌한 여름에는 릴리아스와 동료들은 대개 유럽에서 머물며 재충전하고 후원자들과 만났다.

 

해마다 무슬림이 금식하는 라마단 기간에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렀다. 라마단 금식은 이슬람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였기에,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 때문에 순교와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릴리아스와 다른 선교사들은 더 집중적으로 기도했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다가 결국 라마단 기간 동안 성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라마단 기간의 성찬 예배는 곧 시험의 순간을 의미했다.

릴리아스는 건강 문제 때문에 또 다른 방식의 패턴을 가졌다. 과중한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 보면 몇 년에 한 번씩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지곤 했고, 심장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사역을 뒤로하고 회복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릴리아스는 결코 병약한 사람처럼 살지 않았다. 쉬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머물러 하나님과 함께하는 훈련의 시간을 가졌고, 글을 쓰거나 창작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릴리아스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그림으로 바라보며 많은 비유를 남겼고, 병상에 있는 동안 이 비유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연은 창조주의 가르침으로 가득했다.

 

19183, 릴리아스는 30년간의 수고를 함께 했던 절친한 친구 블랑쉬를 고열로 잃었다. 블랑쉬가 세상을 떠난 후 10년 동안 알제리 선교단은 적어도 14개 사막 도시에 거점을 마련했고 29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기까지 성장했다. 알제리 선교단은 1964년 북아프리카 선교회와 합병했고 1987년 아랍 세계 선교회로 바뀌었다. 릴리아스와 블랑쉬를 포함한 미혼의 동역자들은 열악한 환경과 병약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난관들을 헤쳐나가며 많은 일들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의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창안했고, 가족 캠프를 열어 문화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결혼을 원하는 아랍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매를 해주어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도왔다. 릴리아스 일행이 단기선교를 처음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국제 기독교의 덕분에 교회 집회와 국제 학회에서 무슬림에 대해 소개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릴리아스의 심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약해졌고, 세상을 떠나기 3년 전부터는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그녀는 알제리 선교단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릴리아스는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필요로 하신다는 생각에 기뻤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모든 것을 홀로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릴리아스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인 [일곱 겹의 비밀을 여는 길]을 완성했다. 그녀는 매우 차분하고 평온함을 주는 사람이었으며, 강인한 평온함은 뜨거운 아궁이에서 하얗게 달궈진 쇠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설명되었다.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게 된 후, 낮 시간의 평온한 모습과 달리 밤이 되어 홀로 깨어있을 때 릴리아스는 여전사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지도를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고, 그 밑에서 전략을 짜고 기도로 탄원하며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몸부림쳤다. 지도 위에는 자필로 "주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깨어 있으라"고 새겨 놓았다.

릴리아스는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도의 능력은 동일하며,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땅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기도의 기쁨을 더해준다고 고백했다. 문을 닫고 하나님과 함께 서서 눈에 보이는 모든 외부 세계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아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도는 직접 그곳에 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릴리아스는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에 대해 묵상했고, "모든 혈관마다 붉은 피가 흐르는 대신 빛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실제로 연약한 육체는 찬란한 영적인 빛이 스며들어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28827, 릴리아스의 친구들은 찬송을 불렀고, 릴리아스는 창밖을 바라보며 "병거가 보인다, 말 여섯 마리도 함께 있네"라고 외쳤다. 친구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는 것이냐고 묻자 그녀는 ", 아름다운 것들이 아주 아주 많아"라고 대답했다. 릴리아스는 손을 높이 들고 기도를 했고, 그렇게 갑작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죽음을 맞이했다.

릴리아스 트로터는 오랫동안 기도해 왔음에도 수많은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이슬람이라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작은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제 그 가지에도 꽃이 만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남겨두신 무명의 사람들을 통해 무슬림 국가에 놀라운 복음의 꽃이 피는 경이로운 봄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장 연약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강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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