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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사
https://youtu.be/txAaAHUi4CM?si=xza7FMxyMXREfap3
1. 어린 시절과 신앙적 배경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비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나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특히 아버지 네일 리빙스턴은 열성적으로 전도하는 차 상인이었으며, 상업을 위해 다닐 때에도 성경과 종교 서적을 보급하며 선교사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또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선교사 협회 회원, 기도 모임 책임자였습니다.
소년 리빙스턴은 조용하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주일학교 성경 암송에서 1등을 할 정도였습니다 (시편 119편을 다섯 군데만 틀리고 외워 상을 받았습니다). 열 살 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방직 공장에 취직하여 아침 6시부터 밤 8시까지 일했습니다. 그는 일이 끝난 후에도 야간 학교에 갔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책을 기계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읽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집중력 훈련 덕분에 훗날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2.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리빙스턴은 처음부터 선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한 모든 수입을 선교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구출라프 박사의 중국 선교 호소문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의학도 함께 공부했는데, 방학 동안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선교 희망지는 처음에는 중국이었으며, 복음과 의술을 함께 전하는 의료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1838년(26세) 선교사 협회에 가입했으나,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 전쟁이 터져 중국 선교의 길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3. 아프리카로의 전환과 초기 사역
중국 선교의 길이 막히자 리빙스턴은 초조해하며 기다렸습니다. 이때 남아프리카에서 23년간 사역한 로버트 머펫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머펫의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호소와 모험 이야기는 영국 사회를 흥분시켰고, 리빙스턴은 계획을 바꿔 아프리카로 가기로 작정하고 아프리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840년 의료 면허증을 취득했습니다.
1840년 11월 20일 정식으로 선교사 임명을 받은 리빙스턴은 1841년 7월 남아프리카의 선교사 협회 주재소(로버트 머펫이 살던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더 북쪽에 새로운 주재소를 설치하라는 지시에 따라 아프리카 주민들의 말을 배우기 위해 깊은 마을로 들어갔고, 6개월간 토착어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 다정한 말솜씨, 진정한 친절, 그리고 의학 지식은 아프리카인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1843년 바뀐족의 추장 세칠레를 방문했을 때, 추장의 외아들을 포함한 두 아이의 병을 낫게 해주어 추장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리빙스턴은 1843년 6월 마보차에 선교 본부를 정했습니다.
4. 사자 공격 사건과 결혼
마보차는 사자들이 득실거려 원주민들이 고통받는 지역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원주민들에게 사자 한 마리를 잡도록 설득했고, 그가 사자 한 마리를 명중시켰으나, 사자는 쓰러지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리빙스턴은 사자의 공격을 받았고, 그의 왼쪽 팔 윗부분에 사자의 이빨 자국 11개가 남았습니다. 이 상처는 불완전하게 아물어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후 리빙스턴은 자신이 직접 설계한 돌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로버트 머펫 선교사의 딸 메리 머펫과 결혼했습니다.
5. 선교와 탐험의 시작 (아프리카 횡단)
리빙스턴은 친구인 추장 세칠레가 다스리는 바뀐족 마을로 옮겨갔습니다. 물 부족으로 고통받던 이 마을을 리빙스턴은 강가로 이전하도록 설득했고, 함께 운하와 오두막, 학교를 지었습니다. 이 지방의 첫 열매는 추장 세칠레였습니다. 세칠레는 성경 지식이 뛰어나고 설교도 잘했으며,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여러 명의 아내 중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낸 후 리빙스턴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 비를 막는 마술을 쓰고 있다고 믿었고, 교회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에 리빙스턴은 더 넓은 아프리카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는 1853년 마콜로족 지역에 도착하는 등 밀림 속을 헤치며 두 달 이상 전도했습니다. 이 탐험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열병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보다 넓은 아프리카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 편지에 썼으며, 열병에 걸리든 걸리지 않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서해안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려 노력했는데, 그는 노예를 사기 위해 밀림을 헤쳐 다니는 장사꾼들도 가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선교사가 갈 수 없단 말인가라고 되뇌며 위험을 극복했습니다.
1853년 11월부터 1854년 6월까지 7개월간의 무서운 여행 동안 31번이나 열병에 걸렸습니다.
굶주림과 사나운 부족들의 습격 속에서 그는 마침내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 식민지 상파울로 데 루안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지쳐서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으나, 동행했던 원주민들을 고향으로 다시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더 어려웠는데, 강을 건너다 소가 쓰러져 강물에 빠지기도 했으나 수행원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고, 결국 27명의 수행원과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휴식 후 그는 다시 동쪽 해안을 향한 위험한 길을 떠났습니다. 잠베지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웅장한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4년을 걸려 아프리카 거대한 대륙을 횡단했으며, 이는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1855년 영국 지리학회는 그에게 탐험가가 얻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인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리빙스턴은 탐험가로서 이름을 떨쳤지만, "나는 오직 선교사입니다"라고 강조하며, 자신의 지리적 업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심하게 아플 때조차도 환등기를 사용하여 성경 장면을 보여주며 원주민들을 인도했습니다.
6. 영국 방문, 아내의 죽음, 그리고 노예 제도 타파
선교 사업을 위한 재정 지원이 협회로부터 거절되자, 리빙스턴은 직접 영국으로 가서 모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탐험가, 지리학자, 의사, 선교사 등 다양한 명칭으로 환영받았으며, 강연과 선교 여행기 판매 수익을 아프리카 선교 기금으로 적립했습니다.
1858년, 그는 아내와 막내딸, 탐험대원들과 함께 두 번째 아프리카 항해를 시작했으나, 케이프타운에서 아내 메리 리빙스턴의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장인 로버트 머펫이 있는 쿠루만으로 보냈고, 아내는 4년 만인 1862년 1월 남편 곁으로 돌아왔으나,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리빙스턴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는 슬픔 속에서 천국을 자신의 고향으로 더욱 인정하며 아내가 자신보다 이 여행에서 앞섰을 뿐이라고 기도했습니다.
리빙스턴의 사역에서 지워지지 않는 문제는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죄악이었습니다. 악덕 상인들은 리빙스턴의 이름을 팔아 노예를 잡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들을 볼 때마다 분노를 느꼈고, 때때로 노예들을 석방시키기도 했습니다. 루안다로 가던 길에 노예 상인들에게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요구하여 노예들을 석방시켰습니다.
그는 노예 상인들의 무자비한 행위를 목격하며 백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큰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84명의 노예(주로 여자들)를 구출했는데, 이들은 다시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하며 리빙스턴 곁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들을 새로운 마을에 정착시키고 선교 협회에 연락하여 이들을 위한 전도자를 양성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7. 나일강 근원 탐색과 스탠리 기자와의 만남
탐험 비용 초과로 영국 정부가 탐험대를 소환하는 긴급 공문서가 날아왔고, 리빙스턴은 아내를 잃었을 때만큼 큰 슬픔 속에서 세 번째 아프리카 생활을 마감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잠베지 강과 그 지류들』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친구 로데릭 머치존 경의 권유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의 분수령과 나일강의 근원을 결정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1868년 3월 19일, 55세 생일에 잔지바르를 떠나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백인 대신 해방된 노예 출신 흑인 수행원들을 데려갔는데, 이들은 충성심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탐험 도중, 수행원 중 한 명인 요하나가 리빙스턴 박사가 살해당했다는 거짓 소식을 퍼뜨려 전 세계가 슬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살아 있었으나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차, 커피, 설탕 등 필수품은 바닥났고, 거칠고 맛없는 옥수수 종류만 먹었으며, 끊임없이 굶주렸습니다. 그는 6주간의 폐렴으로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었고, 매일의 생활이 고통스러워 빨리 임무를 끝내고 고향에서 눈을 감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랍 노예 상인들의 방해와 원주민들의 습격, 질병 등으로 고통받았으며, 심지어 원주민들이 그를 노예 상인 취급하며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창에 맞을 뻔하고 쓰러지는 나무를 피함).
1871년 11월 11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뉴욕 헤럴드』 신문사 특파원 헨리 M. 스탠리가 리빙스턴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찾아왔습니다. 스탠리는 식량, 편지 꾸러미, 약품 등 풍부한 보급품을 가져왔는데, 영국 여왕이 제공한 1,000파운드 상당의 물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만남을 백만 대군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게 여겼습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건강을 회복하라고 권유했지만, 리빙스턴은 거절했습니다. 그는 "나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나일강의 근원을 찾는 것보다도 더 큰 임무가 있는데, 그것은 노예 제도를 없애는 일입니다"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의 숭고한 정신에 존경을 표하며, 4개월 4일 동안 함께 살았지만 그에게서 결코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8. 마지막 여정과 영원한 안식
리빙스턴은 스탠리가 떠난 후 59회 생일(3월 19일) 일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 해가 가기 전에 일을 끝내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노예 매매를 저주받은 거래라고 증오하며, 자신이 이 일을 없애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모든 고생을 견딜 수 있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873년 4월 29일은 리빙스턴의 지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일랄라의 추탐보 마을에 도착한 그는 오두막 안 거친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수행원들은 그의 얼굴에서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날 새벽 4시경, 수행원이 방을 열었을 때, 리빙스턴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9개월에 걸쳐 무사히 영국으로 운송되었고, 1874년 4월 18일, 위대한 선교가이자 탐험가였던 리빙스턴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영국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2만 마일을 여행하며 냐사호, 탕가니카호, 므웨루호, 방궤울루호 등 여러 호수와 강들, 그리고 놀라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습니다. 원주민들을 사랑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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