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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의 생애/ 지금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ㅣ기도와 사랑으로 삶을 불태운 참 목자

  • 이은아 목사
  • 2025-12-17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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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의 생애 1

https://youtu.be/c6nRan8t4Kc?si=NRwQJM9mwo8G-RrK

 

 

 

이용도의 출생과 어머니의 영향

이용도는 190146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51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신앙 형성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어머니 양말이 여사였습니다. 그녀는 전도부인으로서 교회와 사회 활동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으나, 이용도의 부친은 술을 좋아하고 가족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은 칼을 휘두르며 협박할 정도로 박해했으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아버지의 폭력보다 강했습니다. 또한 이용도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교장이 예수 믿는 아이들을 퇴학시키려 했을 때도 어머니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은 이용도는 13세부터 교회 종탑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등 남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

 

한영서원 시절의 가난과 영적 체험

1915년 이용도는 개성의 한영서원에 입학했습니다. 윤치호가 설립한 이 학교에서 그는 민족 지도자들을 접하며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 의지를 키웠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은 극심한 가난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학비를 벌며 공부하느라 늘 배고픔에 시달렸고, 식비를 내지 못해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배고픔과 서러움에 부자들이나 돈 있는 자들을 저주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으나,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약속(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을 기억해 내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191610월에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신생(구원) 체험을 하게 됩니다.

 

독립운동 투신과 옥고

이용도는 신앙인이자 뜨거운 독립투사였습니다. 19193.1 운동 당시 송도고보 학생으로서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수감되었습니다. 이후에도 1920년 기원절 사건, 조선독립준비단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1921년에는 태평양 회의에 맞춰 조선 독립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동맹 휴교를 주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예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추운 겨울, 사형수의 얼어붙은 수갑을 자신의 배에 품어 녹여주거나, 배고픈 죄수들에게 자신의 밥을 양보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감옥에서 만난 애국지사를 아버지처럼 섬기기도 했습니다 [4-6].

 

신학교 입학과 내적 갈등 그리고 변화

3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1923년 학교로 돌아온 이용도는 왕영덕 선교사의 권유로 1924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신학 공부보다는 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민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치적 투쟁보다 종교의 힘, 즉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교 동기인 이호빈, 이환신과 의형제를 맺고 인왕산 밑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가난 속에서도 신앙의 우정을 키웠습니다. 이 시기 이용도는 예술과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기도가 메마르는 위기를 느끼고 다시금 눈물의 기도를 회복하며 십자가의 고난을 갈구하는 영성으로 깊어졌습니다 [6-9].

 

폐병 3기 진단과 강동 부흥회의 기적

이용도에게 가장 큰 시련이자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1925년경 그는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고 의사들도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 속에 누워 있던 그에게 평안남도 강동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용도는 병상에서 죽느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다 죽겠다는 결사각오로 친구 이환신과 함께 강동으로 떠났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선 강단에서 이용도가 찬송하고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배당은 통곡의 바다로 변했고, 일주일간 이어진 집회는 눈물과 감격으로 채워졌습니다. 기적적으로 이용도의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용도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이후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부흥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0-12].

 

이 영상은 이용도 목사가 단순한 종교인을 넘어,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내고, 그 고통을 기도의 눈물과 십자가 사랑으로 승화시킨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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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 2

생의 승리사는 길피를 주소서눈물을 주소서

https://youtu.be/R5gIahlyS8g?si=GOTtBlhUxhdXmdWI

 

 

 

딸의 죽음과 생의 승리

19273, 신학교 졸업을 앞둔 이용도는 기쁨보다 깊은 슬픔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딸 영숙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기도했지만, 결국 딸은 한 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딸에게 새 옷 한 벌 해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쓰다 남은 옷감으로 수의를 지어 입혀야 했습니다. 딸을 잃은 슬픔은 너무나 커서 그는 쏟아지는 눈물로 딸의 이름을 부르며 그 슬픔을 주님 제단에 바치려 애썼으나, 마음이 산산이 흩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용도는 슬픔 속에서도 주님을 붙잡으려 몸부림쳤습니다. 그는 죽은 딸에 대해 주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체험을 통해,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잠들어 있으며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안식임을 깨닫고, 슬픔조차도 은혜로 받아들이며 생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길

딸을 잃기 전인 19272, 이용도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일기를 남겼습니다. 그는 한국 교회에 기도, 사랑, 감사, 봉사 등은 없고 비평, 돈을 모으려는 생각, 다툼, 탐욕만이 가득하다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교인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결은 싫어하고, 오히려 죄와 타협하며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살리는 길로 그가 제시한 것은 밀실의 기도와 참된 회개였습니다. 웅변은 사람을 움직일 뿐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은혜를 내리게 한다고 믿었으며, 참된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새 삶을 살아가는 열매가 있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목회자의 정체성과 고난의 길

이용도는 사람들이 목회자의 영성보다 입고 있는 양복의 질을 보고 평가하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첫째 조건은 신앙이며 그 수단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목사를 하나님의 대사로 정의하며, 대사의 직임이 막중하므로 날마다 신앙과 지식을 수양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특히 이용도에게 목회자란 고생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고생과 죽음을 각오하고 사역했던 것처럼, 목사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군병으로서 고생과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목사가 평안에 취하면 교회가 병들지만, 목사가 고생을 참고 나가면 교회는 승리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육체의 질병과 피와 눈물의 영성

192711, 졸업반이었던 이용도는 다시금 심각한 건강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피가 부족하고 골병이 들었다고 진단하며 치료비로 큰돈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가난한 그는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 피와 눈물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죄와 싸워 이길 힘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피를 수혈받기를 원했고, 시기와 질투 같은 마음의 병균을 죽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뜨거운 눈물을 구했습니다. 피가 없으면 영적인 생기가 없고, 눈물이 없으면 사랑이 메마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졸업과 초기 사역의 시련

1927년 성탄절, 이용도는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라는 연극을 직접 쓰고 주연을 맡아 예수님의 고난을 생생하게 연기하여 관객들을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19281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강원도 통천구역으로 파송되었으나, 초기 사역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에 치우쳐 있었고, 민족주의 대신 사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인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영적인 침체와 전도의 실패를 경험한 이용도는 자신의 신앙에 혁명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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