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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신안 섬마을 믿음의 어머니

  • 이은아 목사
  • 2023-01-07 12: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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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신안 섬마을 믿음의 어머니

https://youtu.be/DEC6hdl_plo

 

 

 

문준경은 1891년 전남 신안의 작은 섬 암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양반 가문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머리가 좋고 지혜로웠던 그녀는 호기심이 많았으며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루는 작심을 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그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시며 열심히 살림이나 배우라고 혼을 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존여비 사상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여성들 중 낮은 계급에 있는 여성들은 낮에는 논밭에 나가 허리가 끊어지게 일을 하고 돌아와 집 안에서 혼자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야 했으며 밤에는 졸린 눈을 비비며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고 바느질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반면 교육과 복지로부터는 철저하게 소외당했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여성은 1천 명에 2명 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여인들에게 여자로 태어난 것은 그 자체로 무거운 죄였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봐야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문준경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묵묵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림하는 법을 배워 나갔습니다. 그녀가 이때 배운 바느질 솜씨와 살림의 기술은 나중에 그녀 혼자서 생활하게 될 때 더없이 요기하게 쓰이게 되었습니다. 소녀 문준경은 어느덧 아리따운 아가씨로 성장했습니다.

1908년 3월 18일 열일곱의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된 그녀는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 쉽지 않은 시집살이었지만 타고난 성품과 워낙 착하고 모난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차츰 시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시댁에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편 정근택은 결혼 첫날부터 문준경을 외면하고 무시하며 아내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남편 정근택은 결혼 전부터 이미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증도 위쪽에 있는 임자도에 여자를 숨겨두고 부모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혼례를 치른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찍이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탓에 매사에 자기밖에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 있는 생과부라 부르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살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남편의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문진경이 자식을 낳지 못해서 남편이 외도를 한다는 소문이 돌아 여인네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녀가 빨래를 하러 가거나 물을 길러 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녀는 서름에 겨워 목놓아 울다 지쳐 생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시부모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등선리 앞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젖은 옷과 흙이 묻은 고무신을 빨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후 몇 번에 걸친 자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살 생각보다는 죽을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동안 그녀의 몸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시름시름 앓더니 이내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머리카락까지 몽땅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봐도 죽을병에 걸린 모습이었습니다. 시부모의 손에 끌려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선 남편은 다 죽어가는 부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는커녕 아내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문 밖에 서서 퉁명스럽게 한 마디 툭 내뱉었습니다. ‘얼마든지 더 살 수 있는 시퍼런 나이에 꼬라지가 다 죽게 생겼네.’ 그게 다였습니다. 남편이 다녀간 뒤 시부모의 지극한 간병 덕분에 그녀의 몸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몇 년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 남편이 어느 날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그녀의 방을 찾지 않았습니다. 동이 트자마자 대문을 나서는 남편을 그녀가 붙잡아 세워 지금까지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망과 탄식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냉정하게 뿌리친 남편은 임금이 개하고 말하는 거 봤냐 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뼈저린 고독이 깊은 병이 되었다가 죽음과도 같은 홍역을 치르고 난 다음 스스로 고독을 이겨내고 다스리는 길을 찾아냈습니다. 차츰 남편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섬기며 효성을 다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하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망나니 같은 아들을 둔 잘못으로 며느리에게 늘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준경에게 한글을 배울 것을 권유하고 그날부터 그녀는 시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배우고 난 뒤로 자신의 삶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집 나간 남편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읽고 쓰고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확신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빠른 시간 안에 깊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틈나는 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신학을 공부하여 여성 목회자가 된 것은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과 학구열 때문이었습니다. 시집살이를 통해 유일하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 주셨던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3년 상을 치른 후 시어머니와 그녀는 증동리에 사는 큰 시숙의 집으로 이사를 가 살림을 합쳤습니다. 큰 시숙은 시아버지 다음 갈 정도로 문준경에게 잘해주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시집 와서 20여 년을 살던 증도를 떠나 친정 오빠가 살고 있는 목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포 북교동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재봉틀로 삭바느질을 해서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1927년 3월 5일 문준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부지런히 삭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 잠자는 부인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뜨거운 지옥의 불구덩이에요. 자매님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하고 헛됩니까 이런 세상에 참말로 믿을 거라고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돌아오는 주일에 초각교회에 나가기로 그 부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북교동에 있는 초각교회는 훗날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며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가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는 개척 교회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통해 문준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성봉 목사를 만남으로써 이제까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성봉 전도사가 목회를 맡게 되면서 목포 교회는 날마다 교인들이 늘어 놀랍게 부응하게 되었으며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 목포 전체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이때까지 낮에는 삭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거나 교회에 나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문준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삶의 희망과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영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체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 장님이 눈을 뜨듯 막막했던 인생 속에서 찬란한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게 된 문준경은 날이면 날마다 사는 게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에 나가 기도에 매달리면서 틈나는 대로 자신이 전도를 받았던 것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먼저 내 부모와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받게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과 친정 식구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방문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 식구들 몽땅 다 예수님 믿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어라. 아버지 예수님 믿으시오.” 아버지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집 가서 고생한다길래 짠한 마음에 잘 대해주려고 했는디 이건 또 무슨 소리다냐 그다고 말하려면 다시 오지 마라.”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틈나는 대로 아버지와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문준경 집사는 찬송을 아주 잘 불렀습니다. 특히 임형진 목사가 지은 희망사라는 찬송을 잘 불렀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탐내지 마오.” 이렇게 이어지는 찬송은 무려 16절까지 계속되는데 문준경 집사는 이걸 다 외워서 즐겨 불렀습니다. 그녀가 마을 언덕 위에서 희망사를 불러대면 마을 아이들이며 어른들 아낙네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그녀를 감싸고 자리에 앉아 넋을 잃고 노래를 감상하고 있으면 그녀는 더욱 신이 나서 다양한 노래를 선보였습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녀는 복음을 전하며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문준경 집사의 전도는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문준경 집사는 신안 일대 섬들을 돌아다니며 이런 식으로 전도에 매달렸습니다.

신안의 여러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문준경 집사는 자신의 성경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찬송 부르는 일이야 자신 있었지만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공부한다면 전도할 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남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자식도 없으니 전도 부인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경성에 있는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밤낮으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하다가 이성봉 전도사의 추천을 받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 하지만 면접 과정에서 전도 부인으로서 활동하려면 미혼이거나 남편과 사별한 부인의 경우가 아니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있는 부인들의 경우 어렵게 공부를 마치더라도 전도 부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은 기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남편이 있는 부인들은 입학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원장을 붙들고 매달리며 통사정을 했습니다. “원장님 지는 남편이 있기만 하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시방까지 그 사람은 밖으로만 돌며 첩을 얻어 살고 있으니 저는 생과부입니다. 지는 주님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워낙 끈질기고 간절하게 애원하는 바람에 원장은 조건부로 그녀의 입학을 허락했습니다. 정식 원입생 신분이 아닌 청강생 신분으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문준경은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 만 40세였습니다. 청강생으로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공부하게 된 문준경은 기쁜 마음에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청강생은 기숙사에 들어갈 수가 없어 학비 외에도 비싼 학숙비와 생활비가 따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정식으로 원입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절대 호적을 더럽힐 수 없다며 이혼은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정을 주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남보다도 못한 남편이 이혼을 못해준다며 반대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문준경은 이혼을 포기하고 올라와 다시 청강생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쌀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끼만 먹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녀는 예배당으로 뛰어 들어가 강단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습니다.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제가 호의호식 하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공부해서 전도 부인이 되어 시방까지도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저 섬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구원받게 하려는 겁니다. 돈도 떨어지고 배는 고파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요. 주여 힘을 주십시오. 길을 보여 주십시오.” 이때 예배당 밖에서 어떤 남학생의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만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가사를 생각하며 찬송을 따라 부르는데 갑자기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은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다 당하셨는데 저는 겨우 배 좀 고픈 걸 가지고 불평과 한숨으로 주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약한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났더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개운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이성봉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준경은 경성에 올라와 공부하면서 자신이 겪게 된 어려움에 관해서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이성봉 전도사는 곧장 원장님을 만나 사정했습니다. 남편이 있어도 자기 아내를 절대 다시 찾지 않을 사람이니 문준경을 정식 원입생으로 받아주길 청했습니다. 덕분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형편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 수입이 없던 처지라 뭐라도 돈 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시자 남편 정근택은 남겨주신 재산을 몽땅 가로채고 그녀에게는 밭 몇 마지기를 떼 준게 고작이어서 늘 돈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바늘 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등 온갖 일을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기에 그녀의 기숙사 방은 사랑의 방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어느 날은 한 여학생이 울면서 찾아왔습니다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내려가 봐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남의 어려움을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성품인 그녀는 생각 끝에 자신의 재산 목록 1호인 손재봉틀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마련해 왔습니다. 이렇게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자기 일처럼 돌봐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주고 살았으니 아무리 열심히 허드렛 일을 하고 장사를 해도 생활이 쪼들리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주위에서 보다 못한 학생들이 걱정해 주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준경 전도사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저는 아직 굶어 죽을 지경이 아니에요. 성경에도 너의 손이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하셨어요. 참말로 하는 구제는 동전 두 닢을 가진 가난한 거부가 그걸 몽땅 주님께 바친 것 같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제 아버지신데 설마 친딸인 지를 굶어 죽게 놔두시겠어요.”

 

경성성서학원은 6년째 학교였습니다. 무려 6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1년 내내 공부만 한 게 아니라 3개월은 공부를 하고 나머지 9개월은 단독으로 교회를 개척하도록 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곳은 많고 지도자는 부족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학 공부와 목회 실습을 병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실습 기간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섬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경성에서 신안 바닷가까지 내려가려면 길도 멀거니와 교통비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돈이 넉넉지 않았으니 그녀는 내려가는 차비만 달랑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며 기약 없이 걷다 보면 반드시 누군가 나타나 태워주곤 하였습니다. 문준경 전도사가 경성성서학원을 다니면서 실습 기간 중 고향에 내려와 처음으로 개척을 시작한 곳은 임자도였습니다. 임자도는 문전도사 남편인 정근택 씨가 첩을 얻어 살고 있는 섬이었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임자도는 쳐다보기도 싫은 섬이었을 것입니다. 남편과 소실이 미워서라도 일부러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래 이 세상에서 그렇게 멋대로 살다가 죽어서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져 피눈물 나게 고통당하며 살아봐라’ 라는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전도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던 것부터 먼저 치료하려 했습니다. 남편과 소실을 예수 믿게 해서 변화시켜야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작은 초가를 얻어 어렵사리 교회 개척을 시작하자 남편과 소실은 그녀가 자신들에게 앙심을 품고 회방을 놓기 위해 일부러 임자도에 들어와 이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극렬하게 교회 개척을 방해하며 온갖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더불어 마을의 교회가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던 사람들의 핍박도 심했습니다. 문 전도사는 이들을 맞상대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저 묵묵히 자기 일만 했습니다. 부지런히 마을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자신의 장기인 찬송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대개 글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성경책과 찬송가가 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전도사는 가사와 곡조가 쉬운 찬송가를 여러 번 불러 외우도록 했으며 성경 말씀도 암송하기 좋은 구절들을 골라 반복해서 따라 읽도록 했습니다.

마을에 믿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리하게 전도 활동에 나선 탓에 문전도사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목은 늘 쉬어있다시피 했으며 식사도 제대로 못해 탈진하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날은 밤늦게 겨우 찐 살을 입에 한 움큼 넣어 씹고 먹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입안이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심방해서 신앙 성장을 도왔고 각자의 기도 제목을 놓고 밤낮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신자들은 이런 문전도사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해서 아이가 어미 품을 찾듯 교회를 찾았으며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여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진리교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날마다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임자도에 개척한 진리 교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문준경 전도사는 자기가 시집 와서 20여 년을 살았던 증도로 들어가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증도 역시 임자도와 마찬가지로 문전도사에게는 쓰라린 아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증동리와 대초리를 바쁘게 오가야 했던 문전도사는 노두를 건너던 중에 바닷물이 들어와 오도 가도 못하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문전도사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노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험판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대초리 사람들은 증동리 사람들에 비해 폐쇄적이었습니다. 미신과 우상숭배 깊이 빠져 있었으며 마을의 교회가 세워지는 데 대해 극도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전도사가 대초리에 들어온 이후 여자들이 더 게을러졌으며 남자들은 쓸데없이 노래만 부르고 다닌다면서 험담을 퍼부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항상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등잔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갑자기 초롱불이 꺼지자 예배당은 칠흑같이 깜깜해졌고 부녀자들은 놀라 허둥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청년들과 함께 나가봤더니 사내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웃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늘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횡포는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전도하러 가는 문 전도사의 길을 막고 욕을 하며 옷을 잡아 찢기도 했고 예배드릴 때마다 술을 마시고 나타나 소리를 지르며 예배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지날 때면 항상 침을 뱉고 욕을 해댔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문전도사는 더 간절하게 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좌절하거나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토록 못살게 괴롭히는데도 변함없이 자신들을 대하고 사랑을 베풀어 복음을 전하는 문전도사를 보고 이들의 마음이 결국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섬과 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은 작은 돗단배가 전부였습니다. 하루는 파도가 일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었는데 증도에서 임자도로 가기 위해 무리하게 배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거세지면서 무섭게 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호들갑을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순간 문전도사는 사공이 놔버린 노을 부여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제가 여기서 죽는다면 불쌍한 우리 어린 양들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저는 하나님 믿고 전도자가 되었으니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제 막 개척한 교회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남은 사명 끝까지 완수하고 죽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말씀 한마디로 바람을 잔잔케 하신 주님! 이 파도와 바람을 잔잔케 하여 주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기적처럼 바람이 잔잔해졌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배 위에서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이런 기적을 체험했으니 예수님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긴 여정 끝에 드디어 경성 성서학원을 졸업하게 된 문준경 전도사는 본격적으로 복음 전도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증동리 교회를 선교 본부로 삼아 머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순안 일대의 섬들을 돌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의 목회 방식은 완전히 종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하는 목회였습니다.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 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한 번은 증도리에 장질부사가 돌았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흔히 염병이라 불렀습니다.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려면 환자의 집에 들어가야 하고 시체를 만져야 하는데 전염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죽어가는데 시체를 치울 수도 장례를 치를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온 동네의 냄새가 진동하면서 살벌한 죽음의 기운만이 서서히 퍼져 나갔습니다. 일본인 관리들도 마을 주민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때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문준경 전도사가 나섰습니다. 환자의 집에 들어가 시체를 옮겨 날랐으며 조촐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했습니다. 이렇게 나서서 죽은 사람들을 치우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문전도사는 전염되지 않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전도사는 산파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평생 아이 하나 낳아본 적이 없지만 산모에게서 아이를 받고 아이를 돌보며 키우는 데는 선수였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요, 식당이요, 조산원이요, 유치원이요, 우체국이며, 양로원이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를 만나는 사람은 늘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았고, 위로받았으며,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돌아다녔으니 신발인데 나만 할 리가 없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가 신고 다니던 고무신이 1년이면 무려 9켤레나 달아 없어졌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고무신 바닥은 아주 얇고 잘 벗겨지기에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신발은 신으나 많아 발이 시려 견디기 어렵고 동상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겨울에도 고무신만 신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꽁꽁 언 빙판 위를 걷다가 넘어지기 일쑤여서 항상 손목 발목이 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사람들을 돌봤으니 이런 목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1936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펴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교회를 탄압했고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문 전도사는 거의 매일같이 일본 경찰에 불려다니며 괴롭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취조가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했는지 마을로 돌아올 때는 항상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연 속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문전도사를 보고 일본 경찰들은 두 손을 들고 말았으며 교인들은 문전도사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북한의 침입으로 6 25 사변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증도에도 인민군 50여 명이 들어와 동네 불한당들을 앞세워 주민들을 괴롭히며 구타와 구금을 일삼았습니다. 공산당들은 뭐든지 이유를 붙여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가두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웠다는 죄로, 좀 잘 사는 사람은 잘 산다는 죄로, 교회를 다니면 예수님 믿는 자는 죄로 잡아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전도사의 남편과 소실도 잡혀와 갇혀 있었습니다. 문전도사는 이때도 이들에게 정성을 다해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문 전도사는 나이가 많아 공산당들이 때리고 고문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전도사들과 교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문과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문 전도사는 이들을 돌보며 조국의 운명을 위해 날마다 피 끓는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9월 27일 밤 문준경 전도사 양도천 전도사 이봉성 전도사가 목포에 있는 정치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9월 28일 새벽 문전도사 일행이 목포에 도착하자 어찌된 영문인지 공산당들은 이미 다 철수하고 없었습니다. 국군이 상륙한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문 전도사 일행을 내버려 두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이때 전국을 돌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다가 전쟁을 맞은 이성봉 목사는 우연히 목포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이성복 목사와 문준경 전도사는 전쟁 중에 눈물 어린 재회를 하게 됩니다. 한숨을 돌린 문준경 전도사는 빨리 증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자리에 일어섰습니다. 어서 그들에게도 국군이 상륙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성도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문전도사를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사야 26장 20절에 보면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잠깐 숨을 지어다.’ 라는 말씀이 있어요. 지금 가면 위험합니다. 증도에 우리 국군이 먼저 들어가서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하고 나면 그때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아직은 공산당들이 그대로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지혜롭게 행동해야지요.” “안 됩니다. 목사님!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이야 괜찮지만 성도들이 모진 수모를 겪고 있을 텐데 제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10월 4일 밤 배를 타고 다시 증도로 들어온 문준경 전도사는 그들에게 발각되기만 하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10월 5일 새벽 2시 증동리 앞 백사장은 살벌한 죽음의 기운만이 감도는 암흑천지요. 무법천지였습니다. 광기와 도끼만 남은 공산당들은 끌려온 양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때리고 죽창으로 찔려 죽였습니다. 드디어 문준경 전도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문전도사를 향해 새끼를 많이 깐 씨암닭이라고 놀려대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문전도사는 그들에게 교인들만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 중 한 명이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 영혼을 받아주시오.”

문준경 전도사는 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평소 흠모하던 스테반 집사처럼 신앙의 거울로 삼던 사도 바울이 걸어간 그 거룩한 길을 따라 하나님 품으로 영원한 안식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 만 59세, 우리 나이로 60세였습니다. 하나의 밀알 같은 그녀의 삶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혀졌습니다.

문전도사의 영적 슬하에서 성결교의 이만신 목사, 한신대의 정태기 교수, CCC 총재를 지낸 김준곤 목사, 이봉석 목사, 10여 명의 중진 목사가 배출되었고, 섬겼던 교회 중에 하나인 진리 교회에서는 그가 자식처럼 양육한 제자 중에 13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이분이 개척한 교회에서는 70명의 목회자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전남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 천국의 섬이라 불리는 증도의 복음화율은 무려 90%가 되었습니다.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의 눈물 겨운 헌신의 삶이 오늘도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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