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관상'이 아닌 것
관상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기도에 대한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에 대한 지혜를 줍니다.
오래 전에 논문으로 정리해 둔 것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저의 신앙과 기도에 도움이 되었기에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깊은 체험을 한 믿음의 사람들의 통찰이 담긴
이 글을 통하여 성도님들의 기도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Thomas Keating,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Thomas Merton, New Seed of Contemplation,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관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관상이 배척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므로 관상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무엇이 관상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관상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무엇보다 관상을 해보는 것이다.
첫 번째 관상은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전례를 통해 평화와 만족을 얻으려는 감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들은 관상을 체험하기 전의 과정으로 필수적이지만 그것들이 관상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한다. 관상은 오히려 상처와 같이 마음 깊은 속에 있는 많은 의문들까지 열어 놓는다. 관상체험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조용하거나 정열적이거나 하는 성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상상과 열정 그리고 활동적 정복욕에 사로잡혀 명상이 마치 물질적 부나 정치적 권력 혹은 교수직이나 고위 성직인 양 생각하여 그것을 차지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결코 관상에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은 수고로 지치고 상처를 입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관상 기도는 긴장해소 훈련이 아니다.
관상을 통해 긴장이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다. 관상은 일차적으로 관계성이므로 지향(指向)성을 갖는다. 관상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고 기도이다. ‘기도합시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갑시다.’, 혹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합시다.’, 혹은 ‘하나님과 가진 관계를 실습합시다.’라는 뜻이다. 환각제를 주입했을 때와 같은 ‘뜬 기분 상태’, 황홀이나 무아자경, 열정, 감미로움, 광란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감각이나 열광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감정과 육체적 무의식의 결과일 뿐이다. 이들은 디오니소스적 “id”의 영향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세 번째로 관상기도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그리고 은사는 지역 공동체의 건설에 쓰이도록 주어지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은사들이 그 사람의 성덕이나 기도 단계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은사들은 관상 기도와 같지 않으므로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을 자동적으로 거룩하게 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관상에 따라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관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들을 관상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은사에 집착하게 되면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곧고도 좁은 관상 기도가 성덕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다. 변형의 과정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그 성장의 열매이며 그 성장을 지속시켜주는 것이다.
네 번째로 관상기도는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그 현상을 미리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든지, 심장박동이나 호흡과 같은 신체 과정을 조종한다든지, 육체이탈(肉體離脫) 경험이나, 몸이 떠오른다든지(浮揚), 기타 다른 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疑似) 심리현상이 아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크리스챤 전통에서는 가능한 한 이러한 선물을 피하도록 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사 심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시는지 아닌지는 우리 인간이 분별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이러한 의사심리현상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이것들로 해서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리거나 우리의 기도시간이 산란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이 현상들은 지나가 버린다. 만일 향심기도 중에 이러한 일이 생기면 즉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섯 번째로 관상은 신비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비적인 현상이라고 하면 신체 탈혼, 외적 혹은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어지는 음성이나 사람의 영 안에 새겨 주시는 말씀 등과 같이 그 사람에게 특별히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말한다. ‘가르멜의 산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극단적으로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적 현상을 거부하도록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있다. 토마스 머튼은 그러한 현상은 반드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전혀 다른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카리스마적’ 선물, 하나님께 거져 받은 선물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체험한 사람의 성화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관상기도는 성화의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기르는 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고 그것은 하나님과 온 피조물을 아우르는 사랑의 행업이라고 말한다. 외적 음성이나 환상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성인들조차도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메시지를 받을 때에 우리의 상상으로나 이성으로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할 것을 그분은 보증하지 않으신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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