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으로 행복하고 온전해지는 예수참영성원
관상에 이르는 길 (기도의 세가지 단계)
16세기 스페인의 여성 신비가 아빌라의 데레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똑같이 내리지 않습니다.
골짜기 물처럼, 냇물처럼, 강물처럼,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변화하며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깊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보통의 말로 하는 기도(1단계)부터, 단순한 기도(2단계: 침묵,묵상기도), 깊은 임재까지(3단계: 관상,침묵)
세 단계의 기도가 한 번에 동시에 오기도 하고, 한 번에 한 가지 기도만하기도 합니다.
은혜가 점점 많아지고 영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관상의 상태가 점점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합니다.
관상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기도에 대한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에 대한 지혜를 줍니다.
오래 전에 논문으로 정리해 둔 것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저의 신앙과 기도에 도움이 되었기에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깊은 체험을 한 믿음의 사람들의 통찰이 담긴
이 글을 통하여 성도님들의 기도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찾으려 하고
우리의 선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자각을 요구합니다.
이 자각은 우리의 외적 자아에 대한 일종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외적 자아와 일치하고 거기에 애착하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과 죽음의 변증법을 알아들으면
신앙으로 인해 따라오는 위험을 감수하는 법과 틀에 박힌 생활로부터 우리를 풀어주고,
새로운 존재, 새로운 실재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것을 택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
우리는 성경이나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안에서 수많은 기도의 형태들이 실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형태에 따른 분류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클리프스 월터스(Clifton Wolters)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도를 그 내용에 따라 흠숭․감사․고백․중재․청원의 다섯 가지로 나눈다.
클리프스 월터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도를 흠숭․감사․고백․중재․청원의 다섯 가지로 나눈다. 이것을 포괄하는 범주로서 ‘화살 기도’는 정규적인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 마치 하나님을 향해 화살을 쏘아 올리듯이 토로하는 은밀한 낱말 또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기도를 말한다. 모든 형태의 기도, 심지어 신비기도까지 ‘침묵기도’라고 포괄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기도하는 형태에 따라 예수기도, 화살기도 음성기도, 묵상기도, 성찰기도, 침묵기도, 관상기도등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각각 기도에 대한 정의와 기도의 방법들을 실천하며 가르쳐 왔다. 그밖에 공적 예배에 드리는 기도, 묵상을 돕는 동방교회의 ‘예수기도’와 묵주 기도(로사리오)가 있고 특별한 형태로 제마(提魔)기도, 안수기도, 축복기도, 금식기도 등이 있다.
예수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러서 그를 회상하며, 헌신을 다짐하고, 그의 은덕을 힘입으려는 기도 형태이다. 이 기도는 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여(들숨)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낼숨)”라는 방식으로 드린다.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헌신을 다짐하며 회개, 통회와 신적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비형상적 비언어 및 비사고적 기도를 위한 내적 고요와 침묵의 추구에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이 토마스 머튼은
기도가 점차로 깊어지고 계속 성장하는 것으로 3단계 기도유형을 구분한다.
1단계: 지적 회상기도(reflexive prayer)입니다.
2단계: 명상적 기도(meditative prayer 또는 meditation)입니다.
즉 “하나님의 직접개입”(God's direct interven tion)이라는 체험을 기점으로 인간의 능동적 기도(active prayer)입니다.
3단계: 관상적 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contemplation) 또는 수동적 기도(passive prayer)입니다.
즉 기도는 자연합일상태에서 행해지는 명상기도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의 사건을 계기로 관상기도를 행하게 되고 결국 神秘合一(mystical union)에로 이르는 과정이다.
첫째 ‘지적 회상기도’(reflexive prayer)는 의식의 표피에서 움직이는 기도이다.
주객 구조 선상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대부분의 대화 모형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의식의 표피에서 이루어지며 중언부언하는 기도이거나 자기 자신의 자기 암시적 반성기도이다. 초보단계의 묵상기도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내 영혼을 통해 기도한다기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말을 거는 기도의 첫 단계이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심화된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단계는 명상적 기도(meditative prayer 또는 meditation)이다.
인간 심령의 깊은 속에로, 사물의 깊이에로 한발 더 들어가 자기 심령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직관, 직증․직체험하려는 자세이다. 이 기도는 적극적 자세로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의 기도요, 성서에서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자세이다. 정신이 하나님의 일에 충분히 교화되고 마음이 쉽게 그분께 향할 수 있게 되면 묵상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 없게 된다. 때로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영혼은 더 이상 이런 초보적인 수련에 의지하지 않고도 곧바로 친교로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한결 심화된 앎 속에서는 이전에 누리던 자유로움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 간단한 구절들을 자주 반복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진다. 마치 남녀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현란한 수식어의 말은 갈수록 함축성 있고 의미 깊은 짤막한 구절로 바뀌지만 성실성이나 진실도가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단계는 ‘애정적’ 단계로서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들고 말수는 점점 줄어든다.
명상적 기도는 1단계보다는 깊은 기도이지만 아직 자아의식이 너무 강하게 의식적으로 살아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성령을, 은혜를 주관하고 모색하고 간구하고 호출하고 요청하려는 자세이다. 명상기도는 세속적인 것, ‘거짓 나’에서 ‘참 나’로, 하나님적인 것, 존재의 원천을 향해있다. 명상기도는 기도의 원천이 ‘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며 이해하는 일들이 통용되고, 상징과 의식, 지적인 이해들이 중요하다. 기도와 병행되는 자기정화의 노력도 애써 악을 멀리하고 애써 덕을 닦는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중심을 이룬다.
향심기도
현대에 관상 기도로 들어가는 데에 일어나는 장애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것으로 향심 기도가 있다. 수련으로서 향심 기도는 우리의 정신 집중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에서부터 빠져 나오고 우리의 의식을 영적 수준에 열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사고(배)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이라는 강 위를 떠내려가게 두고 우리의 의식의 강 자체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향심 기도는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할지라도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며 모든 느낌과 사고를 떠내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큰 방해물인 사고들과 큰 싸움을 통해서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고들에 유혹되거나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때에는 조용한 장소에서 가장 방해받지 않을 시간에 비교적 편안한 자세로 일상 활동으로부터 감각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편안한 자세에서 눈을 감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의향을 표시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것과 같다. 향심 기도란 주의(注意, attention)라기보다는 지향(志向, intention)이다. 무제한의 시간 동안 하나님만을 바라며 인내하는 것이다.
향심 기도에서 지향이 중요한 이유와 사고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에 나타난 인간의 여섯 가지 기능의 성격의 변화와 사고유형의 구분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고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상기도를 하는 데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자연질서의 일부로서 자체 안에 ‘마음’, ‘이성’, ‘의지’라는 중요한 세 가지 기능과 ‘상상’, ‘관능(官能)’이라는 두 가지 부차작인 기능이 있다. 이성과 의지는 이들이 물질적인 일들과는 아주 동떨어져서 완전히 영적으로 가능한 중요한 기능이다. 그에 반해 상상과 관능은 육체 안에서 육체적인 도구들, 즉 다섯 가지 감각들을 빌려서 작용하기 때문에 부차적인 기능이다. 마음은 다른 모든 기능들은 물론 이 기능들과 연결되고 있는 일들까지도 자체 안에 영적으로 포괄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이성’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능이다. ‘의지’는 선이 이성에 의해 승인 받은 연후에 그 선을 취하게 하는 기능으로, 인간은 이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만족하고 동의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모든 일을 본성에 비추어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죄로 인해 은총이 빛을 밝혀주지 않는 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상상’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현재나 과거까지도 그려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상상이 주인인 이성에게 아주 고분고분하게 순종해서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왜곡되고 허황된 것은 그려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상이 복종을 거부하여 여러 가지 왜곡된 생각이나 환각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관능’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반응들에 영향을 주고 통제하는 영혼의 기능으로, 이것을 통해 유쾌하거나 불유쾌한 육체의 창조물들을 알고 체험한다. 관능은 육체적 필요를 보살피는 기능과, 육체적 욕망에 대처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관능은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자신의 주인인 의지에게 유순하게 순종해서 왜곡된 육체적 즐거움이나 고통, 거짓된 영적 즐거움이나 고통으로 끌어들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원죄의 결과로 인간이 탐욕스러운 환희를 통제하지 않는 한 세상의 온갖 재물과 육신의 음욕을 무턱대고 탐닉하려 들며,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인간적이고 영적이라기보다 온통 동물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의 영적 훈련에서 먼저 거짓 자아를 부숴 버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향심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의식의 흐름 속에 사고들과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기도 중에 사고들을 구별하려고 기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 사고들의 형태를 구별하는 것은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해 중요하다. 관상 기도의 과정에서 어떤 때는 평화롭지만 어떤 때는 사고와 정서들 때문에 매우 억눌리게도 된다. 이 두 가지 경험은 모두 완성과 치유의 같은 과정의 일부이다.
첫 번째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산만한 상상들이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으로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이다. 상상으로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면 거듭거듭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한다. 때로 무수한 야구공이 날아들 듯 사고들이 날아들면 솔직하게 “나는 이 사고들로 얻어터지고 있다.”고 시인하고 참아 내라.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 기도는 완전히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두 번째는 정서적으로 흥미를 끌며 떠오르는 사고들이다. 예를 들면 친구와 대화하는 중 길 옆에서 말다툼이 벌어져서 호기심을 끄는 것이다. 어떤 대응을 요구하는 사고이다. 그러면 단지 거룩한 단어를 떠올려야한다. 그런데 이때 자신에게 짜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짜증도 하나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기도자에게 아주 밝은 아이디어나 기가 막힌 영감이 떠오르거나 아주 긴급하게 기도할 마음이 솟구쳐 올라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단지 일어나는 그대로 떠나보내야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내적 성찰이나 심리적 개안을 말한다. 아주 눈부신 신학적 성찰이나 엄청난 심리적 개안처럼 보이는 것이 맛있는 미끼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잠시 시간을 내어서 이 기막힌 성찰을 파악해야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고가 아무리 멋지고 좋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을 잊어야 한다. 그 밝은 생각은 나중에 다뤄야 한다. 이 기도는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태도는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자신의 사고와 감정 같은 것들도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자신의 사고와 감정뿐만 아니라 영적 체험과 위로 심지어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마음까지도 떠나 보내야 한다.
네 번째 종류의 사고는 자아성찰이다. 이것은 기도자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궁극적 신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체험으로 “마침내 내가 어느 곳에 도달하였구나!”, “이 평화는 아주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잠시 시간을 내어서 기억해 두면...”과 같은 사고들이다. 이 사고들에 붙잡히면 바로 즐기던 평화에 빠져 나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맙소사! 뭐가 잘못된 거야”하고 의아하게 된다. 하나님의 현존은 숨쉬는 공기와 같다. 그것들에 매달려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소유하려 들지 말고 떠나 보내도록 가르친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완전한 기도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도이다.”라고 한다.
다섯 번째 종류의 사고는 일종의 신적인 치유와 같은 ‘내적 정화’의 단계이다.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며, 이 작업은 하나님이 하시는 정신 치료의 학교이다. 이것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긴장을 사고라는 형태로 표출하도록 신체를 도와준다. 어렸을 적에 가졌던 충격적인 정서적 경험들의 후유증이 우리의 신체와 신경계통에 긴장, 불안, 기타 각종 심리적 방어 체제 등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이런 것은 일상적인 수면과 휴식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깊은 내적 침묵이 가져다 주는 깊은 휴식 중에 이러한 정서적 장애 요소가 부드러워 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신체에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즉 인간을 해롭게 하는 요소들을 배설해 내는 능력들이 이 장애들을 없애기 시작한다.
정서적 장애를 털어 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 우리의 자아 성찰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늘어난다. 그러면 소위 좋은 뜻으로 가졌던 관계가 아주 더러운 행주 더미처럼 보이게 되며 스스로 우리는 우리가 믿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은 신성한 빛이 우리의 마음을 더 밝게 비추어 주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전압을 올리시면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정규적인 관상기도로 우리의 정신적 건강에 대한 자연적 자원이 다시 살아나 우리의 삶에 해를 끼치는 거짓 가치관을 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묻어 있던 어릴 적의 정서적 반응 체제가 이제는 아주 명백하게 인식 속에 떠오르게 된다. 무의식의 짐을 덜어내는 과정 중에 때로 특정한 미소나, 고통, 가려움, 혹은 강한 감정들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기를 원하고 이것들이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털어 내는 과정에서는 어떤 특정한 옛날 사건들과 관련짓지 않는 것이 이 과정의 특징이다. 구분할 필요가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단지 그것들 전부를 던져 버려야 한다. 이때 내적 평화로부터 오는 안도감은 나의 인격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더욱 갖게 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자연적 성향이 있다. 동시에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동의 성향, 그리고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은총이 우리 안에 완전히 흘러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성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상 기도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할 힘을 가지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을 완전히 채우시고 우리의 전 신체-영적 유기체를 변형시키고는 이 유기체를 하나님 사랑의 융통성 있는 도구로 삼기 원하신다.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도움이 되는 묘안이 있다. 먼저 유혹들 너머로 눈을 주고 거기에서 다른 무엇을,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유혹을 애써 무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이 압도적일 때 관상가는 전투에서 잡힌 포로처럼 넙죽 엎드린 채 더 이상 대항하지 않고 적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친히 권능을 띠고 내려오시어 그대의 원수들에게 앙갚음해주시고 그대를 안아 올려 다정하게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산고이다. ‘그 영혼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겸허한 사랑의 흐름’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하나의 선한 의지’이다. 이 의지는 모든 완덕의 본질이다.
어느덧 잠재의식의 문은 열리고 온갖 신기한 형상이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진짜로 위험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해를 끼치는 분심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깊고 평화로운 일에서 멀리 떼어 하루 일과와 관계되는 근심 걱정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황에도 기도의 핵심은 기도하려는 마음이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열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의가 중요한 것이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편안하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해야한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현존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정화하는 분심의 폭풍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게는 가장 안전한 비상책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찾으려하고 우리의 선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자각, 외적 자아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 하면 모든 일과 매 순간은 나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며 어느 날에는 이 씨앗들이 나의 자유에 뿌리를 내리고 나의 자유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싹트면 나는 하나님이신 사랑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기쁨은 수확이 될 것이라고 토마스 머튼은 말한다. 이 과정에서는 두 가지 다른 심리 상태를 유발한다. 하나는 영적 위안, 성령, 은사, 심령 능력에서 오는 개인의 발전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서(자아 지식)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부터 오는 인간적 약함의 경험이다. 이 때에 하나님께 헌신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오랜 신앙 습관과 기도생활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있어야 안전하게 보호된다. 자칫 자만심으로 빠져들면 자신의 영적 처참함을 느껴 자기비하와 절망으로 빠져들 수 있다.
세 번째, 관상(Contemplation), 주부적(注賦的) 혹은 신비적 명상, ‘수동적’ 명상을 의미한다.
명상기도가 성숙되면 말이나 생각, 개념들이 덜 중요하게 되고 상상이나 이해가 사막처럼 되며,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들이 “無知의 구름”(cloud of unknowing)속에 숨는 단계가 온다고 한다. 이러한 황량함과 당혹감의 고통은 ‘어두운 밤’, ‘오감(五感)의 밤’으로 표현된다. 바로 이 “無知의 구름”속에 숨는 단계가 오면 관상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즉, 사막과 구름은 하나님의 직접개입의 표지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순수한 믿음의 어둠 속에서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능동적 기도에서 활용되던 감성, 이성, 의지, 상상력 등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또한 불가능하게 되는 건조함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현존을 알게 된다고 한다. 영혼이 자신의 기도가 완전히 건조해져 버렸다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된데 대해 적이 당황하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응답하고 있지만 그는 너무나도 가까이 간 나머지 평소의 정신상태로는 마주하는 체험을 해석하지 못하며, 이런 상황은 평소의 정신상태가 거기에 맞도록 조정될 때까지 이어진다. 바로 정신의 수신장치가 수신되는 신호음의 강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를 식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대로 조정하는 일이 한동안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는 영혼은 무척이나 힘든 고통을 당하는 바, 그도 그럴 것이 오직 하나님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황량함과 당혹감 뿐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두운 밤의 세 가지 표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나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만약 우리가 태만한 경우라면 주님을 찾고 싶어 애타는 감정을 느낄 리 없고, 몸이 아픈 경우라면 만사가 귀찮아져서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마비가 될 것이다. 세 번째, 아무도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더욱 새롭게 당신을 보여주시지만 그전처럼 감정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밤’을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영적 진보가 있기보다는 퇴보가 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친히 영혼에게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제거하신다. 이 밤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영혼이 순화될 필요가 있다는 한 계속 지속된다. 밤은 기도생활에 위기의 시간이다. 빛의 순간이 따르기도 하지만 영혼은 참을성을 잃고 돌아서기도 한다. 영혼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 모든 것 이면에는 하나님을 감지하는 이런 필연적인 깨달음과 하나님을 바라는 엄청난 갈증이 자리한다. 그저 ‘신음과 괴로운 산고’만 있을 뿐 ‘열망에 찬 기대’는 전혀 없다. 꺼지기를 거부하는 가느다란 희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영혼은 자신을 이탈한 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붙잡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 것이다.
또한 이 깨달음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넋을 잃고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는가 하면, 오랜 기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할 수도 있다. 이 깨달음이 우리 감정을 통해 전달될 경우 두려움에 젖고 겸손해지는가하면 무아경에 빠져 들뜨기도 하고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히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자신의 참 목적으로 향하여 나아간다. 관상에서 오는 황홀한 기쁨은 도저히 표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본성 상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다. 이야기한다면 ‘환희’를 암시하는 ‘천상의 도시’로 가는 길, 피해야할 함정들,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 거쳐야 할 훈련, 뚫고 지나가야 할 안개를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때에 ‘더없이 놀라운 위로와 감미로움’을 내려주시기도 한다.
이 기도의 침묵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닌 말이나 관념을 뛰어넘은 어떤 것 또는 어떤 분의 현존이 자신의 내면 속에 가득 차오는 것이다. 이때 해야 할 일은 오직 생각이나 추론의 시도를 ‘망각의 구름’아래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 침묵, 기다림,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므로 모든 사유, 열망, 희망, 공포, 이미지, 야망 등을 ‘망각의 구름’에 떨쳐내야 한다고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잊었다. 잊었다. 잊었다”를 외친 것처럼 잊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은 대개 고통으로 치닫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이 말한 ‘무를 알려는 욕망’, 즉 사변적 이성의 포기 그 자체는 무엇이든 알려고 하고 사람과 그의 능력을 사용하려는 사람에게 커다란 희생이다. 관상 기도의 어찌할 수 없는 텅 빔 속에서 그들은 커다란 고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고삐가 어느 정도 풀리면 예기치 않았던 맹렬한 분출을 토해낸다. 신이 사탄으로 나타나 감각을 격렬한 유혹으로 매질하며, 때로 시각적인 이미지로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또는 현기증의 영이 기도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이 때의 기도는 믿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며 유혹이 지나갈 때까지 참고 머물며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런 잠재된 의식의 내용들이 급작스럽게 의식 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선에서의 마(魔)의 장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 당황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정확한 어떤 것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갖고 있는 지식의 정확도를 높이려고, 그리고 사랑의 느낌을 강화하려고 애쓴다면 그대는 그분의 일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고 그분은 그분의 빛과 그분의 은총을 거둬들이시고 말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평안과 고요와 은거 안에서 살라. 완전하게 사심 없는 사랑과 커다란 평안 속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들을 수행하라고 한다. 바로 측량될 수 도 없는 길을 걸어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온전하고 굽힘 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겨 드려라. 이 어둡고 사랑에 겨운 인식은 마치 저 다음 삶에서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모습을 밝혀 드러내는 매개로 작용하듯이 이 세상 삶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 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이 어둡고 사랑에 겨운 인식에 의하여 하나님은 아주 놓은 신적인 경지에서 영혼과 결합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대 안에서 더욱 완전한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이 어렴풋하게 감지되던 상태에 이어 무한정한 결실이 맺어지면서 영혼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형언할 수 없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 ‘침잠기도’를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과 방식으로 온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까닭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만 지속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체험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단지 자신이 어떻게 아느냐 까지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채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책이다. 이 동안 정신과 오감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영혼이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아 하고 육체와 정신이 깊은 행복감에 조용히 자신을 내맡기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완전히 자기를 비우고 정화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현존과 성령의 뜻과 그리스도의 의지에 완전 의탁․일치․기다림의 자세이다. 일체의 자기 계획과 의지와 인식의 허상을 버리고 자기의 중심을 하나님의 중심과 일치시킴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려는 자세다. 사랑의 애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감싸이면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마음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말어이다. 인간의 지적인 기능, 심리적 정서적 기능, 육체 생리적 기능이 모두 참여하는, 곧 전인적 존재가 통째로 참여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실제로 느끼고 체험하는 수용적 자세의 기도인 것이다.
시간성에 매인 상태가 아니라 영원한 시간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황홀한 상태의 기도이다. 이 상태를 김경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분별지가 극복되고, 죄인과 성인의 도덕적 구별 의식이 극복되고,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대립․갈등․긴장이 극복되고, 나와 너의 주객구조가 극복되고, 나와 하나님의 이원적 분리가 은총과 사랑의 황홀한 빛 속에서 극복된 상태의 기도이다. 관상적 기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심령 상태는 선과 일맥상통하는 경지에 이른다. 순수 의식 가운데서의 초월의 경험은 곧 일상적 자아(Ego)를 넘어선 하나님에게 그 존재를 뿌리박고 숨쉬고 있는 참 자기(the genuine self)의 초월적 인식이다.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자아”는 없어진 “큰 자기”, “본래 자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본래의 하늘(性命)에 일치한 자기”, 소위 말하는 불심(佛心), 도심(道心), 천심(天心)으로서의 마음이다. 우주 만물과 호흡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기쁨과 괴로움의 감정이 통하는 마음으로서의 자기이다.
‘완전한 합일’은 일치감이 너무나 깊은 나머지 정신이 온전히 사로잡혀 황홀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법열적 합일’은 그보다 더욱 깊은 단계로, 합일의 강도 때문에 정신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도 정지되어 버리는 상태를 말한다. 환희와 법열이 외적으로 발산되는 이 같은 표현들은 영혼이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익숙해짐에 따라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비가는 그것을 더없이 고마워한다. 그것은 탈혼 상태가 자기 개인에게는 아무리 큰 기쁨이 될지언정 비롯되는 주변 동료들의 당혹감으로 본인도 곤혹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의 대가들은 법열을 영성의 징표로 삼지 말도록 경고하면서, 절대로 이를 추구하지 말며 설령 찾아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당부한다. 위대한 신비가들 모두 이 현상을 체험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향은 하나님의 방문을 말하는 것보다 본인의 기질과 심리상태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거짓 탈혼은 너무나 위험하다. 신비체험의 극치는 ‘영적 혼인’이다. 영혼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더없이 긴밀하게 합일할 준비를 갖추는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이 직접적인 체험은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정립한다. 머튼은 이러한 체험이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감지할 수 없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어떤 사람은 이해의 선물(gift of understanding)이라는 순간의 분명한 체험으로 타나난다. 몇몇은 관상이 너무나 난해하고 놀라워서 아주 힘든 수고를 많이 하지 않으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 또는 끈질긴 준비를 한 연후에도 아주 드물게 체험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은총 덕분에 영적으로 아주 민감하고 관상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과 더없이 친숙한 나머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걸을 때까지 원할 때면 언제나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참고문헌
Thomas Merton, New Seed of Contemplation
Clifton Wolters, 「무지의 구름」, 성찬성역 (서울:바오로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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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erton, 「명상이란 무엇인가」, 오무수역,
김경재,「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십자가의 성 요한, 「깔멜의 산 길」, 최민순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71)
남승택, “기도의 여정”,「신학전망」(124호 1999년 봄)
Thomas Keating,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Thomas Merton, Thoughts in Solitude (the Abbey of Lady of Gethemani: New York, 1958);한글판,「고독 속의 명상」,장은명역 (서울:성바오로, 1993) 23.
姜建基, “祈禱와 修心”, 「종교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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